빙그르르 돌고 돌아요
엄마가 되었습니다만,
첫아이 육아에 고군분투했던 시절, 내가 전적으로 의지한 대상은 남편보다는 나의 선배 엄마, 친정 엄마였다. 산후조리를 한다고 친정에서 100일간 머물렀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이가 돌을 치르기 전까지 내 몸은 좋고 나쁨의 패턴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늘 쪽잠과 사투를 벌여야 하기에 생기는 만성 피로가 발단이었다. 에너지가 방전될 무렵엔 꼭 몸이 말썽을 부렸다. 한 달의 반 이상을 아이랑 친정에 머무르며 엄마가 지어 준 밥을 먹고 요양 아닌 요양을 하고, 완충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거듭하곤 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대학 종합병원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있는 동안, 아기 없이 홀로 산후 조리원에 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난 엄마 아빠가 있는 집, 친정에 머물렀다. 조리원 입소 날짜를 연기하고 아기가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 병원에 있는 아기는 하루 단 두 번만 허용된 면회 시간에만 볼 수 있는데 정오엔 내가, 오후 6시엔 남편이 아기를 만나러 갔다.
푹푹 찌는 축축한 날씨에 시원한 옷이라도 입으면 좋으련만. 엄마는 집안에서도 꼭 내복 챙겨 입어라, 양말 신어라 쫓아다니며 강조했다. 습한 날씨에 병원 외출에 나서는 나를 보며 차마 내복까지 입으라고는 못하고 반팔 옷은 절대 안 된다며 긴팔과 긴 바지를 권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몸으로 걷기도 불편한데 거의 땀복이나 매한가지인 옷을 입고서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타는 기분이란. 회색 하늘을 그대로 온몸에 뒤집어쓴 것 같은 우울감에 찌들어 도망갈 곳조차 없는 외딴섬에 갇힌 느낌이랄까. 온갖 걱정 시름 덩어리가 나약한 몸과 정신에 여기저기 붙어 있고, 세상 모든 우울감을 흡수한 블랙홀이 이미 몸 안에 그득 차 있는 것만 같다.
내일은 오는 걸까. 아기의 몸 상태를 보러 가는 희망찬, 밝은 마음의 엄마이길 포기한 상태로 하염없이 눈물만 떨어뜨리는 최약체인 나에게도. 암흑 같은 시간만이 더디게 흘러간다. 대본 없이 연출 없이 충분히 그대로 모노드라마 한 편을 찍기에 딱 좋은 우울한 여자. 택시 차창 너무로 스쳐가는 바깥의 풍경은 시계(視界)가 흐려진, 온기도 감정도 없이 무채색으로 일관한 무의 공간일 뿐이었다.
검붉게 농익어가던 장미꽃이 진 자리에 잿빛 하늘과 비구름이 들어서고, 우산을 써도 사정없이 들이치는 꿉꿉한 공기와 부슬비는 당시 나의 심적 상태를 말해주는 대변인과도 같았다. 흐트러진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서 장마 한가운데를 뚫고 도착한 어린이 병동 신생아 집중치료실.
복도 앞엔 나만큼이나 마음 조리며 긴장한 채, 아기를 만날 채비를 마친 엄마 아빠의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다. 각자 다른 상황과 다른 이유로 그곳에 있지만 마음만은 한결같다. 우리 아가,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밤새 무탈히 잘 잤기를, 어제보다 나아졌기를. 하루빨리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같을 수밖에.
줄을 선 순서대로 손을 소독하고 초록색 가운을 입고 치료실 안으로 들어선다. 섬세한 의료진 덕분에 아기는 매일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새로운 속싸개에 폭 싸여 말갛고 고운 빛깔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다행히 아기는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황달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와 광선치료를 위해 눈에 붙였던 안대는 이제 떼어지고 없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머리뼈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붙을 테니 너무 염려는 말라고 소아과 담당 의사는 말했다.
안녕, 아가
우리 아기 빈아
엄마 왔어......
아기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네었다. 그 말을 들었을까. 아기는 실눈을 살짝 떠보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간호사의 도움으로 의자에 앉아 어설픈 자세로 아기를 받아 안았다. 품 안에 들어온 아기는 참으로 작고 여렸다. 간호사가 내게 젖병을 건네며 수유를 권했다. 모든 게 처음인 까막눈 어미인 나 는 설명대로 입술 주변에 젖병 꼭지를 톡톡 갖다 대고는 조금 기다렸다. 눈을 감고 잠을 자던 아기가 입가에 다가온 젖병 꼭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입을 벌려 오물거렸다. 여리고 작은 입술이 있는 힘껏 젖병을 빨기 시작했다.
이어서 간호사가 아기를 무릎께 세워 앉힌 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V자를 만들어 아기 턱을 받치고 톡톡톡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간호사의 능숙한 솜씨와는 달리 나의 자세나 손놀림은 불안정하고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안고 있는 자세도 꽤나 어정쩡한데 아기를 세워 앉혀 그 작고 여린 턱에 V자 손을 갖다 대려니 고개가 푹 숙여질 것만 같아 내내 불안했다.
눈을 뜨지 못한 채 깊이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서도 내가 정말 ‘엄마’가 된 것이 맞는지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든 아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실제인지 꿈인지 아득해졌다. 그러다 문득 흐려진 생각들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눈물 바람을 하게 만든 이 자그마한 영혼이 내 일생을 뒤흔들어 놓을, 크나큰 전환점의 존재가 될 거라는 것.
다행히 아기는 회복 속도가 좋아 입원한 지 10일째 되던 날 퇴원했다. 하지만 나의 심리적 불안은 끝나지 않았다. 종합병원 특성상 성장과 발달 시점에 맞춰 안과, 이비인후과, 소아과 등 진료 과목별로 1년간의 검진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 검진 예약일마다 매번 남편이 연차나 휴가를 낼 수 없기에 친정 부모님의 손을 빌려 병원을 들락거렸다.
어찌 보면 ‘우렁각시’는 남편이기보다는 부모님, 특히 친정 엄마였던 것이다. 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자격을 얻었지만, 초보 엄마로서 불안한 시간들을 안온한 둥지, 친정이 있어 버텨낼 수 있었 다. 전적으로 살림과 육아에 있어서 베테랑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으면서 난 미숙하게나마 조금씩 ‘엄마’가 되 어가는 연습을 몸에 익혀 갔다.
1년이라는 시간이 무사히 지나간 끝에 아이는 무탈하고, 건강하게 첫 돌을 맞았다. 처음으로 신발을 신은 아이는 밑창의 감촉이 어색하고 갑갑했는지 결국 벗어던지고는 남편과 나의 손을 붙잡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연습했다.
어느 가족이나 다 그러하듯 아이의 성장은 감격스러운 순간의 연속이다. 끙끙거리며 몇 날 며칠을 시도하다가 몸을 뒤집고, 배밀이를 하며 포복자세로 기다가, 어느 순간 엉덩이를 들고 앉고, 붙들고 서고...... 외할아버지 손에 들린 붓 끄트머리를 잡고 한 걸음 발을 떼던 아이가 두 걸음, 세 걸음 내딛던 순간! 온 식구는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아이는 무수히 많은 시도와 실패와 반복 끝에 때가 되면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장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른다. 아이의 성장의 면면을 지켜보는 부모는 ‘부모됨’을 서서히 익혀가고, 나를 키운 부모 또한 할아 버지, 할머니라는 이름을 선물받고 지금껏 부모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또 다른 생의 기쁨을 얻어간다.
그렇게 내가 엄마가 되고, 우리 엄마가 외할머니가 되어 가는 시간에 나는 성장통을 앓고, 우리 엄마는 엄마력(엄마가 되어 아이를 보살피는 일, 모성이 성장해가는 일련의 과정)과 부모력(부모가 되어 부모로서 걸어온 길)을 회상하고 다시 그때의 삶을 재생하는 중이었다.
사소하지만은 않은 에피소드 하나.
친정 엄마와 나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는 점이 딱 하나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포대기. 친정 엄마는 포대기 하나면 세상 편했고 나는 아기띠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엄마한테는 어깨걸이를 매고 허리춤에 띠를 둘러 버클을 채우는 형태의 아기띠가 번잡하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육아용품에 불과했다. 아기띠를 몸에 장착할 시간에 손주를 등에 업고 빠른 손놀림으로 포대기 매듭을 지으면 끝이니까. 두 손이 자유로워지니 일하기도 쉽고 할머니 등의 온기와 포근함을 느낀 아이도 쉽게 잠든다며 포대기를 그렇게 선호했다.
반대로 나는 깡 마른 체형이라 포대기를 두르면 후루룩 내려가기 일쑤였다. 꽁꽁 매듭을 매어도 안정감이 안 생겨 쉽게 친해지지가 않았다. 아기띠를 앞으로 착용 후 뒤로 돌리면 아이를 업을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자 굳이 포대기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느낌인지 몰라도, 아이는 외할머니의 포근한 등을 더 편하게 느끼는 듯했다. 나처럼 아기띠에 아이를 안고서 자장가에 맞춰 다소 작위적인 리듬을 타지 않아도, 집안일을 할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보폭과 움직임 때문인지 엄마의 등에 업힌 아이는 쉽게 낮잠이 들었다. 아이는 첫 돌이 지나고 두 돌이 될 무렵까지도 외할머니의 포근한 포대기의 유혹을 쉬이 저버리지 못했다. 외할머니의 등은 낮잠을 위한 최적의 온기와 리듬, 좋은 냄새에 최상의 편안함까지 제공되는 오직 ‘손자 VVIP’를 위한 1등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외할머니의 등에 안겨 잤던 꼬꼬꼬마 아기 시절을 기억하는 걸까. 자기도 엄마 흉내를 내보려고 했던 걸까. 한번은 자신이 아끼는 작은 담요를 들고 와 애착 인형, 곰동이를 업어달라고 주문을 했다. 원하는 대로 아이 등에 곰동이를 놓고 가슴팍에 분홍색 담요를 휘감아 매듭을 지어주었다. 그랬더니 한 바퀴 휘~ 돌며 손가락으로 빙빙 돌려가며 하는 말.
를르를르해찌, 이케....
무슨 말인지 한참을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의 말 그대로 ‘를르를르’를 읊어 보이면, 아이는 어느새 히죽히죽 웃으며 한 바퀴를 다시 휘~ 하고 돌았다.
그제야, “아, 이렇게 빙그르르, 빙글빙글 곰동이를 돌려줬어?” 하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빙그르르 빙글빙글 발음은 되지 않지만, 말속에서도 ‘빙그르르’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 말의 음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다.
한동안 ‘를르를르’는 아이의 눈에 돌아가는 형상의 그 모든 것에 포스트잇처럼 붙어 다녔다. 나와 함께 만든 종이 바람개비도 를르를르. 비 오는 날 우산도 를르를르. 스케치북에 그린 해님도 를르를르.
분홍 담요를 포대기 삼아 꼬마 곰 인형을 업은 어린 아이의 작은 등이 한 바퀴 휘- ‘를르를르’ 돈다. 어린 손자를 업혀 재우려고 삼십여 년 만에 포대기를 다시 두른 엄마의 등이 그 위에 겹쳐 보인다. 내가 엄마가 되고, 우리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돌고 도는 생의 좌표 또는 성장점의 기록이 겹겹이 보이던 어느 날의 단상.
단 한 번, 네버랜드
소소하고 사사롭게
너의 말이 다가온 날들을 기억하며......
#를르를르해찌 #2012 #윤’s어록
#빙그르르 #돌고 돌아 만났지 #겹겹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