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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sian Nov 16. 2019

떠나보면 달라질 거야

경험한 적 없는 여행 <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


조그만 농장 위로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산 위로도... 아래에 있는 땅이
부드러운 녹색 양탄자처럼 보일 때까지
농장 집 주변에 있는 그 모든 것이 빨갛고
하얀 점으로 보일 때까지 높이 더 높이
피튜니아는 왼쪽 오른쪽으로 급히 몸을 틀면서 독수리처럼 날았어.
온 하늘에는 피튜니아 혼자 뿐이었어.
하늘을 나는 일은 정말로 멋졌지.
「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
로저 뒤바젱 그림 글, 서애경 옮김,
시공주니어(1995)


*


나의 서툰 그림은 늘 느리고 더디다. 스케치할 땐 선 하나에 주저하고, 채색할 때의 머뭇거림은 느림의 속도를 한없이 늘어지게 붙든다. 그런 탓에 완성하고도 미완의 느낌이 강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취미 삼아 그리는 거라서 큰 욕심은 없지만 멋진 그림책을 만났을 땐 대리만족과 동시에 즐거운 쾌감이 느껴져 갖고 싶어 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책 모임에서 ‘휴가’라는 주제가 주어졌을 때 표지 그림에 반해서 고른 책 [피튜니아, 여행을 떠나다]. 피튜니아가 저 위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책 표지와 시원시원한 색감의 그림들을 보자마자 바로 소장각!

작가 로저 뒤바젱(1904~1980)의 자유롭고 대담한 그림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러면서도 동물 캐릭터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 섬세하게 다룬다. 책의 색감 또한 기분 좋아지는 톤으로 단순하면서도 강약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글밥의 양도 상당한데 이야기꾼이라고 할 정도로 내용을 이끌어가는 능력도 대단하다. 작가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기에 이야기를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독자도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낸 작가의 능력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

농장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바라보느라 거위 가족의 시선은 늘 하늘을 향해 있다. 비행기가 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부동의 자세로 은빛 비행기를 바라본다.



하늘을 날았다는 기쁨도 잠시, 생각지도 못했던 먹구름과 번개가 피튜니아 앞을 가로막는다. 길을 잃고 표류하다 피튜니아가 내려앉은 곳은 건물과 사람들과 차들로 빽빽이 들어찬 도시의 사거리. 처음 보는 낯선 공간에 피튜니아는 겁부터 난다. 하지만 친절한 경찰과 택시 운전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도시 곳곳을 구경하게 되고. 시골에서는 보지 못한 도시의 동물원 앞에서, 언덕만큼 커다란 배 앞에서, 태산처럼 높은 건물을 앞에서 점점 자기 자신이 작아지는 경험을 한다.


피튜니아는 이젠 어찌나 주눅이 들었던지 자기 자신이 아예 통째로 없어져 버릴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어. 이 그림에서는 피튜니아를 찾을 수 없지. 여기서 피튜니아는 너무나 조그마해서 우리 눈에는 안 보이거든.

그래서 피튜니아는 정말로 자신이 안 보일 만큼 조그마해진 줄 알고 걱정했어. 피튜니아는 당장 시골로 돌아가야만 했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조그마해져서 진짜로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릴지도 모르잖아.


설렘으로 가득했던 시간도 어느새 목적지에 닿으면 우리 또한 낯선 세계에 첫 발을 담그며 여행은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서서 설렘은 감탄과 즐거움으로 바뀜과 동시에 이방인의 시선으로 자동 전환되어 이따금 느껴지는 외로움과 두려움도 감내해야 하기 마련이다.



#내 생애 첫 비행, 영국 이스트본.


스물셋, 대학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휴학을 결정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영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무식하리만큼 꽉꽉 들어찬 시커먼 이민가방과 캐리어, 배낭가방 하나... 인천공항에 도착해 짐을 붙이고 나서 그 날 처음으로 아빠의 불거진 눈시울을 보았다. 나보다 더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던 뒷모습도 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도, 걱정하는 마음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내 뒷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공항에 나오지 않겠다던 한 남자가 있었다. 뒤늦게나마 달려온 그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짓지 않으려 했으나... 역시, 가슴은 머리보다 더 먼저 눈치를 채더라.
 
히드로 공항. 설렘으로 가득했던 시간도 잠시, 이방인으로 자동 전환되어 압도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첫 입국 심사의 기억은 여전히 심장이 쿵쾅-
 


#만 서른을 앞둔 여름날의 뉴욕.


10년을 한결같이 옆에 있어준 사람과 함께이기보다는 일에 얽매여 실종된 신혼. 워라밸(Work + Life, 일과 삶의 조화)에 실패해 위태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늦은 방황이 시작되었다. 도망치듯 사표를 내고 뉴욕행 티켓을 끊었다. 당시, 남편은 날더러 ‘뉴욕병’에 걸렸다고 했다.


내 인생 최대의 사치이자 일탈, 반항, 지독한 열병을 품고, 꿈은 비눗방울처럼 슬로 모션으로 부풀어올랐다.



#집에 돌아가니까 좋다

이 한 마디로 내 마음도 그렇게 평온해질 수가 없다. 푹신한 의자에 철퍼덕 몸을 뉘어 집을 찾게 되는 순간의 포근함이란.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편안해지는 그 시간은 나도 모르게 ‘뭐니 뭐니 해도 내 집이 최고야’라는 안도감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감싸 안아준다.

우린 언제고 집을 떠나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둥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번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여행 내내 피튜니아는 가족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집에 가족이 기다리고 있음은 어쩐지 또 한 번 가슴이 설레고 벅찬 일일지 모르겠다.


이제 피튜니아는 더 이상 날지 못했던 거위가 아니다. 다시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말하는 대로 꿈을 실천할 수 있는 거위가 되었다. 아기 거위들에게 오래도록 전해줄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갖고 있는 엄마이다. 가족과 주변 친구들 또한 한 뼘 자란 피튜니아의 모습을 보듬는 존재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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