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는 외계인 Aug 14. 2024

간과 쓸개는 냉장 보관 중

“내가 아주 많이 사랑 했어.” 


95세인 G, 그녀는 싱글이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던 그녀가 말을 해줬다. 95세 할머니의 소싯적 로맨스라니, 뜬금없는 그러나 귀가 솔깃한 대화의 물꼬를 용변을 보면서 튼 그녀. 스코틀랜드 출신의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을 하려고 했으나 결정적으로 종교가 달라서 헤어졌다고 하셨다. 그 뒤로 모태 솔로로 살아오셨다고 했다. 1920년 대, 내 엄마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신 G의 사랑 얘기, 내 엄마의 사랑 얘기는 상상이 안 되는데 지금 변기에 앉아 있는 그녀의 사랑 얘기는 왠지 영화 속 장면 같을거 같다. 


똑같은 풍경도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볼 때, 똑같은 상황도 내 일일 때와 남의 일일 때가 종종 다르게 읽히는 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열자녀를 둔 내 엄마는 여성이라기 보다 엄마와 할머니로 각인되고, 나에게 3자인 요양원에 거주하시는 싱글인 G는여성과 그녀로 다가온다. 가뭄에 콩 씨앗 올라오듯 드물게 만나는 고객이 있다. 80이나 90세 인데도 비슷한 연배의 다른 분들은‘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이 너무 자연스러운데, ‘이모나 삼촌’으로 불러야만 마땅한 호칭이 될 듯해 보이는 분들. G는그런 고객 중의 한 분이다. 


요양원이든 가정방문 케어이든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유지와 관리면에서 삭발을 제외한 가장 쉬운 짧은 커트 헤어스타일을 하고 사시는 반면, G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단발 머리를 고수하신다. 그 위에 언제나 헤어 밴드를 착용하신다. 아침마다 서랍 한 칸을 가득 채운 다양한 헤어 밴드 중에서 그 날 아침 그녀가 원하는 스타일의 헤어 밴드를 찾아 드리는 일이 요양보호사의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독한 독서 애호가다.  방 안 이곳 저곳에 소설책이 널려 있고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본인이 원하는 책의 제목을 정확하게 말하며 대령할 것을 요구하신다. 가령 침대 옆 안락 의자에서 읽는 책, 잠들기 전 침대에서 읽을 책, 식사 시간에 다이닝 룸에서 읽을 책 등. G는 큰 뿔 테 안경을 쓰고 가끔은 큼직한 확대경을 이용해 독서를 하신다. 많은 입주 어르신들은 낮에는 주로 티비를 보거나 끊임없이 졸고 계시는데 그녀는 언제나 책을 읽고 뜨개질을 하시다 간간이 졸고 계신다.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주로 초록색 계열의 카디건과 스웨터, 목걸이 등을 입거나 착용하는데 내 취향 저격일 때가 종종 있다. 95세, 요양원 생활 중인 그녀는 여전히 센스 있고 엘레강스 하다. 오늘도 초록색 위 아래 옷을 입고 등을 쫙 펴고 앉아 독서나 뜨개질을 하는 그녀는 우아하다. 부럽다. 나도 저 나이까지 살아 있다면 책을 읽고 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수다쟁이다. 한번 대화의 물꼬를 트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술술술 흘러 나온다. 대화 열림 기능은 자유로운데 잠금 기능은 언제나 어렵다. 인지 기능을 대체로 잘 유지해 오신 어르신들의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 같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마땅한 상대가 없다. 바깥 세상과 요양원 안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 바깥 세상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시간이 정지한 듯한 요양원에서 한량처럼 앉아서 그들의 색 바랜 이야기들을 들을 시간이 없다. 노인들은 남아 도는 게 시간이고, 젊은이들은 젤 귀한 게 시간이다. 시간의 불균형, 노인들은 너도 나도 너무 외롭다. 인지능력이 아직까지 대체로 잘 작동하는 G 는 매번 요양보호사들과 길게 이야기 하고 싶어 하신다. 나도 독서를 좋아하고 두 세개의 책을 장소와 상황에 따라 동시에 읽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그녀와의 대화는 즐겁다. 문제는 난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요양보호사란 사실. 나는 요양원에서 일을 할 뿐, 아직은 바깥 세상에 살고 있다. 


삐릭삐릭~, 요양보호사들이 지니고 다니는 인터폰은 한 쉬도 쉬지 않고 울려 댄다. 메뚜기처럼 번호를 따라 이 방 저 방으로 다니며 어르신들의 필요를 채워드려야 하는 게 요양보호사의 일이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역정을 내시는 분도 있고, 화장실에서 혼자 나오지를 못하시는 분도 있고, 가끔은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서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티슈를 뽑아 쓰고 싶은데 티슈가 너무 멀리 있어 닿을 수가 없고, 안경을 찾을 수가 없고, 라운지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은데 혼자서 100 미터를 걸어 갈수가 없다. 그러니 요양보호사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번개처럼 움직여야 한다. 대기 중인 입주자가 많아서 G의 지원을 급 마무리하고 방을 나오려고 하면 G는 발음도 또박또박, 도도하게 명을 내리신다. 


“아직 나가지 마. 내 말 안 끝났어!” 


한번 들어가면 블랙홀, 요양보호사들이 그녀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녀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요양보호사들은 고개를 절레 절레흔든다. 본인은 요양보호사를 장 시간 붙잡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시고 본인이 필요한 세세한 모든 요구들을 관철시키려 하면서도 다른 어르신들을 지원하다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인지 조화의 불균형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한가 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겸손해지고 인내심과 이해심이 늘어나는 줄 알았는데, 요양원에서 근무를 해 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은 듯하다. 괴팍해지기 쉽고,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짜증과 불만이 넘쳐 흐르는 분들이 계시다. 나도 너무 오래 살아 저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화들짝 놀란다. 


요양원의 식사 시간은 난리통이다. 방에서 드시겠다고 하는 분들, 큰 다이닝 룸에서 드시는 분, 작은 다이닝 룸에서 드시는 분을 파악해서 음식을 방으로 갖다 드리던지, 각자의 테이블로 입주자들을 각각 이동을 시켜야 한다. 자기 발로 직접 걸어서 가시는 분을 제외하면 모두 요양보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옮겨 드려야 한다. 와인이나 맥주를 드시는 분, 채식주의자, 당뇨로 식이 조절 중인 분, 본인이 직접 드실 수 없는 분들을 먹여 드리는 일, 식사가 끝나면 후식과 커피나 차까지 마시는 일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분 한 분 각자의 방이나 라운지로 옮겨 드려야 한다. 발이 바닥에 붙어 있을 새가 없이 붕붕 떠 다니는 느낌이다. 


오늘도 점심 시간이 마무리 되어 가고 한 분 한 분을 원하는 장소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G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화이트 와인 한잔과 함께 책을 읽고 계셨다. 와인 잔에 와인이 그대로 있기에 맨 마지막에 방으로 모셔다 드리러 갔더니, 


“입주자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어떻게 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아? 넌 여기에 일하러 오는 거잖아.” 


속으로는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녀에게 항변도 하고 싶다. 왜 매번 본인이 젤 먼저 서비스 받기를 원하냐고, 내가 돌봐야 할 입주자가 얼마나 많은 지 아냐고, 내가 하루에 만보에서 이만보 사이를 걷는다고, 8시간 동안 엉덩이 한번 의자에 붙일 새가 없다고, 내가 놀고 있는 걸로 보이냐고… 


“죄송해요, 다른 분들 이동 시키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담부터는 일찍 올게요.” 


대신 이런 말이 술술 나온다. 난 간과 쓸개 없는 요양보호사다. 아침에 출근할 때 잘 떼어 내어 냉장보관 중이다. 돌봄은 휴먼서비스다. 늙음과 노화와 노쇠도 장애라면, 아니 나는 장애라고 확신하는데, 난 장애인들을 케어하고 지원하는 사람이다. 장애지원사와 요양보호사인 내가 만나는 모든 고객은 장애인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난 이 일을 하면서 고도의 수행중이다. 노화와 노쇠와 죽음과 장애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장애는 이해하고 달래고 적응하면서 사는 것이지 극복하는 대상이 아니다. 난 그들의 장애와는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간과 쓸개는 집에 보관하고 출근을 한다. 


공자의 말씀은 틀렸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기는 그렇다. 공자왈,  50세가 되면 지천명, 즉  하늘의 뜻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60세가 되면 이순, 즉 인생의 경험과 경륜이 쌓여서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귀가 순해지고 타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70세를 종심, 즉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장애와 에이지드 케어 분야의 돌봄사로 일을 하면서 몸으로 매일매일 깨닫는 사실은 나이를 따박따박 먹는다고 공자가 말한 상태가 자동으로 그리고 무상으로 따라오는 별책부록은 아니라는 점이다. 


퇴근길, G와의 우여곡절을 복기하며, 오래전 사망한 동양의 공자를 떠올리며 혼자 반문한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 비해 인간의 수명이 너무 길어져서 그럴까? 인간의 뇌는 70 살 정도에 이르면 배움과 깨달음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걸까? 타산지석이라고 매일 간과 쓸개를 냉장 보관하다 보면 나는 조금은 낫지 않을까? G 덕분에 돌아오는 운전길이 무료하진 않았다. 오늘도 꽉꽉 눌러채운 하루다.

이전 07화 또 하나의 장애, 이민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