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멀티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최근 들어 알았다. 1년 넘게 하던 러닝이 여름부터 시작한 수영 때문에 저 멀리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가 밀치려고 한건 절대 아니다. 러닝에 쓸 에너지도 조금 남겨두고 물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데 막상 물속에 들어가면 그게 안된다. 적당히가 잘 안 되는 내 성격도 좀 문제가 있다.
1년 전, 접수조차 안될까 봐 심장 벌렁대며 신청한 마라톤 대회에 덜컥 당첨됐고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쯤은 이제 아는 나이라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마라톤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여름 내내 수영만 했다.
시간은 기어이 흘러 11월이 되었다. 마침 감기 몸살에라도 걸려줬다면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하면 모양새도 참 좋은데 감사하게도(!) 몸이 건강해서 빼박 참가해야 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주섬주섬 대회복 입고 집을 나섰다.
내내 날도 푸근하더니 꼭 대회날 이렇게 춥고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회장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텐션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중이라 추위에 움츠린 내 모습이 머쓱해졌다.
이 대회는 다들 참가 못해서 안달인 대회라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러너들에게 질투 섞인 부러움을 받는다. '그래, 여기 참가하는 게 어디야. 그냥 슬렁슬렁 뛰자. 마지막 러닝이 7월인데 3개월 넘게 러닝 안 했잖아. 그냥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잘하는 거야. 즐기다 가자'며 나에게 자꾸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건넸다. 나는 절대 슬렁슬렁 안 뛸 거 내가 제일 잘 안다.
출발 신호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날이 추웠고 바람도 꽤 불어서 출발 전부터 조금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파이팅"덕분에 싹 펴지더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햇살이 문제였다. 아니다. 단풍이 문제였다. 그래, 둘 다였다. 가을 햇살이 단풍잎을 통과해서 내 얼굴을 비추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여기 이 많은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울시내 도로를 마음껏 내 속도대로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좋아서 그만 눈물이 났다.
달리다가 만난 시각장애를 가진 러너의 뒷모습에서 눈물이 터지고, 초등학생 아이의 씩씩한 뒷모습에서 또 눈물이 터지고, 세월을 통과하며 쌓았을 탄탄한 허벅지 근육을 가진 할아버지 러너를 보며 또 눈물이 터졌다.
터널 구간에서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질렀다. 터널이라 울림이 굉장하다. 힘내보자고, 조금만 더 견디면 물 마실 수 있다고, 우리 진짜 끝까지 잘할 수 있다고 서로가 서로를 응원했다. 터널 안에서는 심장이 터질 만큼 짜릿했다. 어디서 이런 희열을 맛보겠는가.
3개월 쉬고 뛴 거치곤 기록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달리는 내내 너무 신이 났던 대회라 초라한 핑계안대고 참가한 나 자신을 듬뿍 칭찬해 줬다.
끝나고 마신 맥주는 요 근래 마신 맥주 중에서 최고였다. 당당히 오겹살 1인분 더 추가를 외치며 나만 아는 그런 뻐근한 벅참을 오래도록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