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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Oct 07. 2020

아로하

우리집 조정석

주말에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잠이 들었다. 분명 신랑이 틀어 준 음악은 조정석의 아로하였고, 나는 조정석을 생각하며 너무 행복하게 잠이 들었는데 왜 꿈에 조정석님이 아닌 우리집 남자가 나왔는지는 의문이다.



꿈 속에서 만난 스물세살의 나, 그리고 스물일곱살의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신랑과 나는 이름도 삭막한 '취업스터디'에서 만났는데 그 곳에서 우리의 사이는 꽤 서먹했었다. 전혀 접점도 없었고, 관심을 끌만한 매력도 없었고, 취준생의 우울함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고 싶었는지 스터디장이었던 그는 술자리를 제안했었고, 어쩌다 보니 다들 급한 일이 생겨 (운명의 장난일까) 우리 둘만 먹게 된 날이 있다. 어색함을 술로 이겨보고자, 그와 나는 고추장찌개를 가운데 놓고 배틀을 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술집, 급격히 올라오는 술기운, 그 가운데 고추장찌개, 몇 번을 눈을 마주쳤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이제 전혀 기억도 안나지만 그 집 고추장찌개는 정말 얼큰했고, 그 때의 나는 상당히 들떠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취한 채로 나와서 길을 걷다가 얼마 안가 나의 신발 한 짝 바닥이 벌어져 있었다. 늘 학교 앞 자판에서 만 원짜리 신발을 사서 신었었고, 그 전에도 몇 번 말썽을 부렸었는지라 집에 가서 버려야지, 들키지는 않았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달그락 거리며 신고 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그는 (아직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매너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편의점에 잠깐 볼 일이 있다고 들어갔다가 손에 뭘 쥐고 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내 신발 안창에 본드를 붙여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너무 부끄러웠을텐데,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냥 멍하니 그의 숙련된(?) 본드질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꿈에서 깨어 잔망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물어봤다. 

"왜 무릎 꿇어서 본드 붙여줬어?"

그는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한다. 아직도 매일 우긴다. 그 무릎이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 두 아이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렇게 썸을 타고,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그에게 온갖 감정이 들었지만 아직도 부끄럽다는 감정은 많이 가져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만원 짜리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어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본드로 붙여줄 수 있는 남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부끄럽게 바라보지 않는 남자. 가끔 그는 나에게 비싸고 좋은 신발을 사주지 못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 그는 꽤 좋은 남자이다. (물론 좋은 신발을 한 번 얻어보려고 그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사랑이 언제 시작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나에게는 나를 만 원 짜리로 생각해주지 않았던 그의 무심한 배려가 꽤 감동이었던 것 같다. 가끔은 거미가 너무 부러운데, 우리집 조정석도 나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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