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작가 Oct 07. 2020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는 일

남자친구가 남편이 된다는 것은, 결혼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일이다.



생각지도 못한 시댁 식구들이 1+1이 아닌, 1+10으로 함께 하기도 하며, 사랑을 속삭였던 입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누가 버릴지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손을 마주 잡기보다는 각자의 핸드폰을 쥐고 있는 날들이 더 많아지는 날도 있다. 미혼인 친구의 걱정처럼 설렘, 열정, 자극, 글쎄 이런 단어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을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날들도 있다.



"아침에 이혼하고 저녁에 재혼한다, 그게 결혼생활이야."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좋을 때가 1% 더 많아서 그냥 사는 거야."



엄마의 결혼에 대한 철학이 가끔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위로가, 가끔은 내가 바라던 것들에 대한 포기가 되면서 그럭저럭 지내기도 하는 것이 결혼이었다.



그럼에도 진짜 남편이 된 후에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설렘 포인트는 분명히 있다. 



그는 위로에는 젬병이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그의 대답은 거의 대부분 '누가 잘못했네' '화내고 신경 쓰는 사람이 손해'라는 등 위로는커녕 더 화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짜 위로가 필요할 때, 그는 결국 내 곁에서 나의 말을 들어준다. 끝까지 들어준다. 가장 좋은 건 내가 이런 나의 모자란 말들을 늘어놓아도, 나의 부끄러움을 내놓아도, 그가 떠난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떠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든 나를 이해할 것이다. 그는 나의 사람이다. 그런 믿음 속에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위로가 된다. 나도 몰랐던 나의 감정을 그를 통해 알 수는 없지만 나의 말속에서 결국 스스로 실마리를 찾는다. 그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때 되면 집으로 칼같이 돌아오는 한 남자가 있다는 것이 가끔은 정말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 준 그가 좋아서, 어제는 포상으로 회사 이야기를 길게 할 시간을 주었다. 운을 떼면 그는 재잘재잘 회사 이야기를 한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가끔씩 그가 꺼내는 챔버라든지, 시속이라든지, 각종 이과적 용어가 나올 때 괜히 섹시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다.) 아, 그는 일 얘기를 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자기 일에는 책임감이 크구나, 자기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구나, 그렇게 애써서 번 돈을 나와 아이들을 위해 쓰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정말 뭉클했다.



결혼 생활, 글쎄, 모르겠다. 가끔은 정말 그 사람만 없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날이 분명 있다. 그런데 술 한 잔에 고기 한 점에 그의 말 한마디에 백팔십도 내 마음이 변하는 게, 미움이 사르르 녹는게, 그게 나에게는 결혼이다. 남자친구 출신 남편은 남편이 된 후 내 편보다는 자기 편을 훨씬 많이 챙기지만, 출신은 못 속인다고, 아직 내가 그에게 빠진 그 포인트를 여전히 그는 가지고 있다. 



이따금씩 오는 설렘 포인트가 막걸리 한 잔의 취기인지, 그 자체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가끔 그가 내 남편이라서 좋은 이런 날 덕분에 또 한 달, 길게 봐서 일 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마음을 쌓아두는 것은 아닐까.   

이전 07화 아로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