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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경 Aug 02. 2024

슈퍼와 맥주와 아버지

낯선곳에서 아는 사람을 


오랫동안 한 아파트에 살았다.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아파트는 4개 동뿐이었고 건너편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입구에는 작은 슈퍼가 있었는데 맥주도 팔고 물티슈도 파는 그런 곳이었다. 장을 보러 가기에는 멀고 아이스크림을 갑자기 먹고 싶을 때는  이 슈퍼가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하루는 문을 닫을 무렵 맥주를 사러 갔는데 슈퍼 아저씨가 맥주를 사면 주는 땅콩이라며 작은 봉지를 건네주셨다. 안 받기도 어색하고 받기도 어색했지만 역시 받는 쪽으로 빠른 시간 안에 판단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하고 나왔다. 그날 밤 무빌리지에서 <나의 선한 친구에게>라는 영화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땅콩을 먹었는데 쓰고 고소하고 영화는 독특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 날은 개기일식이 있는 날이었다. 슈퍼 앞은 명당이어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슈퍼아저씨도 함께 서 있었다. 저 다음 주에 이사 가요. 슈퍼 아저씨에게 이사 소식을 알릴 필요는 없었지만 땅콩을 주시고 항상 웃으며 인사를 해주시니 소식은 전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개기 일식은 금방 끝났다. 사람들은 환호하다 실망하며 집으로 갔다. 아저씨도 어디로 이사를 가는지 왜 가는지 묻지도 않으시고 들어가세요. 하고 가게 안으로 가셨다.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개기일식도 이사도 허무하고 허전했다. 달라질 줄 알았던 것들은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은 달라져가고 있었다. 그 아파트를 떠난 후 1년 여가 지난 후 근처 빵집을 갔다가 슈퍼에 가보았다.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필요하지 않은 물티슈를 사고 나오는 길에 눈물이 났다. 상냥한 슈퍼 아저씨 대신 핸드폰만 보는 장발의 청년이 부담스러웠다. 다음 날 충동적으로 대구에 갔다. 모노레일을 타기 위해서. 별다른 이유는 없었지만 낯선 곳에 가서 해보지 못한 일을 하고 싶었다. 대구로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슈퍼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 어. 맥주. 안녕하세요. 슈퍼를 그만두셨나 봐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어제 빵집에 갔다가 슈퍼에 갔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네. 그만두고 다른 도시로 이사 갔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네 정말 신기하네요. 건강히 잘 지내죠.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아저씨도 잘 지내시죠. 네. 그럼요. 우리 강아지 기억나죠. 네 하얀색. 그 강아지 갑자기 떠나고 그곳을 떠났어요. 아... 그러셨군요. 네. 저 차 시간 때문에 이만 갈게요. 반가웠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모노레일은 천천히 움직였고 슈퍼 아저씨와의 만남은 천천히 흘러갔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만 모노레일은 타러 오는 날에는 생각이 나겠지. 그럼 그때 슈퍼 아저씨와 하얀 강아지의 안녕을 빌어줘야지.      


이곳에 오기 한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렇지만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렸고 돈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하루라도 빨리 그저 떠나고 싶었어.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된 것은 갑작스러웠지. 매우 건강하셨거든. 그런데 그날 좀 이상했어. 밥을 한 공기 다 드시고는 한 공기를 더 드셨어. 평소에는 한 공기도 부담스러워하셨는데. 아빠 오늘 많이 드시네요. 응 한 공기 더 줘라. 그렇게 아버지는 밥을 세 공기를 드시고 그날 저녁 쓰러지셨어.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돌아가셨지. 장례시장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어. 그저 놀라고 멍했어. 이곳에 온 것은 그러고 나서 한 달 후였는데 비행기가 이륙할 때부터 눈물이 나더니 도착할 때까지 눈물이 그치지 않더라고. 그 비행기 기내식이 맛있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나도 먹지 못했어. 아버지가 그리웠고 낯선 곳에 가서 살게 될 내 모습이 두려웠고 나만 믿고 있는 아이들이 무서웠고 그리고 설렜어. 모든 감정이 복합적으로 모든 생각이 엉키면서 눈물이 그치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했지. 아이들은 처음엔 걱정을 하더니 10시간 넘게 우는 엄마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어. 기내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잠을 자고 내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었어. 둘째는 혼자 화장실도 다녀오더라고. 드디어 도착했는데 눈물이 그쳤어. 가방을 찾고 심사를 마치고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훅 끼쳐오는 더운 공기. 내가 드디어 낯선 곳에 왔구나. 나는 이제 나만 믿고 있는 두 명의 아이들과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이곳에서 씩씩하게 살아가야지. 10시간 넘게 울었으니 이제 울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며 택시를 탔는데. 어. 너 혹시. 한국말이 들려왔다. 

     

그곳에서 Y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공항에서 빠져나가는 택시 안에서. 너 H 맞지. 어. 어. Y 구나. 오늘 도착한 거야? 당연한 걸 물었다. 으응. 넌 어째서 여기서 택시를... 일단 짐부터 싣자. 그래. 너의 아이들이구나. 안녕. 엄마 대학 때 친구야.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꾸벅 고개만 숙이고 한참을 누구인지 살펴보는 아이들이다. 어디로 가니. 여기.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야. 일단 출발할게. 여긴 옆좌석에 앉지 못하게 되어있어서. 여긴 언제 온 거야? 난 한 10년 정도 되었지. 택시 운전을 시작한 건 한 3년 되었나... 여기 택시 운전기사가 되는 것이 참 어렵거든. 여러 번 떨어지고 겨우 붙었어. 길 외우는 시험을 자꾸 떨어졌지. 그 덕에 지금은 눈감고도 간다. 허허 웃는 것이 대학 때 그대로다. 얘기하다 중간중간 허허 웃는다. 넌 여기에 오기로 한 이유가 있어? 나도 오래전부터 준비한 이민이야. 아이들한테도 좋을 것 같고. 아이들은 여전히 나와 Y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첫째는 아까부터 지도앱을 켜서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 새로운 곳에 가는 동안 늘 하는 첫째의 습관이다. 둘째는 내 새끼손가락을 꼭 쥐고 창문을 보았다, 내 얼굴을 보았다, 한다. 택시 운전 힘들지 않아? 힘들지. 다리도 아프고. 그런데 운전하는 것은 예전부터 좋아해서 그런지 할만해. 그래 너 운전하는 것 좋아했지. 차는 없으면서 어디 간다고 하면 꼭 네가 차를 빌려서 운전하곤 했잖아. 맞아. 그랬지. 그리고 내가 처음 차를 산 날 너희들 다 데리고 바다에 갔었는데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얼마나 무서웠다고. 허허. 대화 중간에 허허 웃는 것은 여전하네. 내가 그랬나. 허허. 너 여기 사는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하는 건데. 우리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세월이 참 길었구나.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회색빛의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높은 빌딩이 있거나 화려한 도시의 색이 많은 도시는 아니다. Y와 나는 대학 1학년때 처음 만났다. 짧은 머리의 Y는 신입생 환영회 때 파란 코트를 입고 갈색 머리핀을 하고 왔다. 시간에 늦어서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고 문 밖에서 양볼이 빨개진 채로 가방끈을 꼭 쥐고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Y를 만나서 OO과예요? 여기 맞아요. 같이 들어갈래?라고 말을 어색하게 놓아버렸다. 응 맞아. 여기 지금 들어가도 되는 거지? 늦었을까 봐... 아직 아무도 안 왔어. 시간이... 한 시간 후야. Y는 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고 나는 그날따라 길이 막히지 않아 일찍 도착한 터였다.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싶어 빈 강의실에 Y 랑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코트가 예쁘네. 고마워. 가벼운 대화가 오고 갔다. 그때 들고 있던 책이 지금 생각하니 이곳의 여행책자였던 것 같다. 여행책자네? 벌써 여행가? 아니 언젠가 가려고 사봤어. 여기 오는 길에. 이걸 사다가 늦은 줄 알고 막 뛰어왔어. 하면서 허허 웃었다. 처음 들어보는 나라네. 그렇지. 나도. 아는 곳이 아닌데 여행을 가고 싶어? 원래 모르는 곳으로 가는 여행이 진짜야. 누가 그래. 여기 이 책 저자가. 허허. 너 그때 그렇게 얘기했던 거 기억나? 내가 그랬나. 정말 여기 여행 왔다가 살게 된 거야? 그건 맞아. 그때 바로 여행을 오지는 못했는데 결국 오게 되었고 지금은 택시 운전하며 살고 있네. 신기하다. 난 네가 엄마가 된 것이 신기하다. 그것도 두 아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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