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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경 Oct 15. 2024

그녀와의 첫 만남

열정적이고 부드러운 


H는 D를 소개해 주었다. 한국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하고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나이가 많아서인지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한 번 만나보기로 했다. 나의 엄마와 같은 나이였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데 오지 않았다. 혹시나 못 찾나 싶어 전화했다. 이제 막 도착해서 1층이라고 했다.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예쁜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빨간 머리 할머니였다. 말 그대로 할머니. 3층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수업을 하실 수 있으실지 걱정되었다. 책상에 마주 앉았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신 지 꽤 오래되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일했는데 지금은 일하고 있지 않다고 했고 절실하게 일자리를 원한다고 했다. 나이가 많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직도 가르치는 것이 즐겁고 좋다고 했다. 경력이 많아 어떤 나이의 아이들도 상관없이 잘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빨간 머리카락 색처럼 열정적이셨다. 대화를 나누어보니 소녀 같았다. 겉보기처럼 할머니 마인드가 아니었다.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 매우 고마워하면서 기뻐했다. 첫 만남이었다.


D의 성은 피게로아인데 그것은 무화과나무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무화과라고 하면 가을과 겨울 사이 아주 잠깐 맛볼 수 있는 과일이 아니던가. 둘째 아이를 낳고 병원에 있을 때 M이 무화과를 사 와서 무화과를 처음 보았다. 이건 어떻게 먹는 건가요.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옆으로 잘라서 안에 있는 과즙을 먹어보라고 해서 아직 엉덩이가 아팠지만, 바닥에 앉아 무화과를 반으로 잘라보았다. 색깔이 예뻤다. 한입 베어 먹으니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그렇게 무화과와 처음 만났다. 그런데 D의 이름에 무화과가 있다니. 실제로 어릴 때 무화과나무를 길렀다고도 했다. 영어로 피그. 스페인어로 피게로아. D는 스페인어도 잘했다. 포르투갈 노래 걸 프롬 이파네마를 아느냐고 했더니 바로 불러주신다. 연륜이 가득한 목소리는 가본 적 없는 이파네마 해변가로 이끌었다. 언젠가 같이 이 노래를 연주하고 노래하자고 했을 때 기뻐하셨다. 이제는 부를 수 없는 노래. 그리고 이파네마.


D는 아이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아이를 좋아하고 사랑이 넘쳤다. 어느 날 커피를 마주하고 앉았을 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아이를 너무나 가지고 싶었어. 임신도 여러 번 했었고 유산도 그만큼 여러 번 했어.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고 모두 초기에 사산되었어. 그랬구나. 정말 슬펐겠다. 나도 한번 그런 적이 있어 어떤 기분일지 짐작이 가. 이미 낳은 것처럼 아팠고 슬픔은 가시지 않았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이야. 나와 내 안의 생명체만 알 수 있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유대감이 있잖아. 한순간에 이유도 알 수 없이 떠나가 버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야. 하물며 여러 번이라니. 그래서 내가 강아지를 세 마리나 키우고 있나 봐. 처음엔 한 마리였는데 이렇게 세 마리나 되었네. 그들이 나의 아가들이야. 어디를 가도 아가들 생각뿐이고 일하러 나오면 걱정이 돼.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이 두려워. 살아있는 동안 정말 잘해주고 싶어. 나중에 우리 집에 놀러 와. 함께 산책하러 가자. 그래 좋아. 


D는 주택에 사는 것을 좋아했다. 빌라나 아파트는 강아지를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빌라에 살았지만, 주택을 알아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체로 주택을 월세로 구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렵게 한 곳을 찾았다. 강아지를 키워도 되고 작은 텃밭도 있는 곳이었다. 얼마 전 차도 샀으므로 출퇴근이 어렵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강아지들 산책을 시켜줘야 했다. 졸린 눈을 비빌 새도 없이 세 마리의 강아지를 데리고 강가로 간다. 몸은 힘들지만, 강아지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내 잠도 깨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중 제일 어린 강아지가 얼마 전에 생리를 시작했다. 기저귀를 채워주었는데 불편한지 끙끙댄다.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천천히 걸어보도록 한다. D는 항상 부드럽게 말한다. 언성을 높이는 그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크다. 시원하고 호탕하게 웃는다. 미국인의 유머라는 것이 때로 어렵지만 D는 항상 유쾌하고 즐거운 얘기를 한다. 그래서 더욱 믿기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녀의 죽음도. 그녀의 부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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