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시 만나다,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기들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고 서류보조만 해 줄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 있는 벤의 가족을 찾아 위임장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벤을 만나본 적도 없고 돌아가신 지 오래된 분인데 가족을 어떻게 찾냐고 했더니 D의 가족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또다시 나는 미국의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예상대로 벤의 가족과는 연락이 끊어진 상태이고 직계가족이라고 하면 본인들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한다. 대사관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가족을 찾을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럼 유골함을 보내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병원에 요청해서 사망진단서를 받으면 해 준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대사관에서 요청서류가 오면 해 준다고 한다. 서로 일을 미루고 있다.
D는 생전에 벤에 관해서 얘기를 많이 했다. 정말 스위트한 남편이었다고 늘 웃으면서 회상하곤 했다. 주말이면 늘 달걀 스크램블을 해서 침대까지 가져다준다고 했다. 토마토가 들어간 스크램블은 정말 맛있었다고 했다. 항상 자기를 너무너무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고 늘 보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었다. 그러니 돌아가시고 나서도 유골함과 함께 몇 년을 사시지 않으셨을까. 항상 미국으로 같이 돌아간다고 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유골함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몰랐다. 서울의 박 선생님과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다. 무척 놀랐다. 문화적인 차이인가 싶었다. 외국인이고 그럴 수 있겠다. 생각도 들었지만 이해가 100프로 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남편분이니 꼭 보내드리고 싶었다. 남편도 여기 화장터에서 화장했다고 해서 혹시 이 회장 증명서를 가지고 가면 사망진단서를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터에 연락해서 외국인인데 몇 해 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증명서를 떼줄 수 있냐고 물었다. 찾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다.
얼마 뒤 전화가 왔다. 기억이 난다고 했고 화장 증명서가 왜 필요하냐고 해서 지금까지의 사정을 얘기했다. 그럼 준비해 놓을 테니 언제 몇 시까지 오라고 한다. 화장터. 말로만 들어보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가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가는 길은 정말 예뻤다. 가다가 사진을 찍었다.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것인지. 화장터에 도착했다. 한 가족이 있었다. 화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은 얼굴에 표정이 없다. 아이들만 까르르 웃을 뿐이다. 그곳에 서서 전화를 하니 표정 없는 남성분이 전화해 주신 분이냐고 하며 봉투를 내민다. 다시 예쁜 산길을 내려온다. 화장터가 참 좋은 곳에 있네. 경치가 정말 좋았다. 다시 병원으로 갔다. 증명서와 각종 서류를 가지고 사정 설명을 하니 잠시 기다려보라고 한다. 조금 높은 지위의 사람인 것 같았다. 서류를 쭉 보시더니 화장증명서까지 어떻게 가져오셨냐 관계가 어떻게 되는 분이길래……. 원래 규정상 안 되지만 해드리겠다. 사망진단서가 금방 처리되었다. 허무하네.
서류들을 장의사분께 드리고 나니 빨리 처리해서 보내드리겠다고 한다. 다행이다. D가 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이제 만날 수 있다니 다행이다. 이메일이 왔다. 미국의 가족들이 D의 유품을 찾아주기를 원한다. 그래 한번 정리를 해야 하긴 하지. 알려주면 한번 찾아볼게 했는데 번호까지 써서 많은 물건을 얘기해 주었다. 일단은 찾아보자고 생각하고 남편과 같이 집으로 들어섰다. 나는 다른 거 정리하고 있을 테니 물건을 한번 찾아봐. 어릴 때부터 보던 동화책인 것 같았다. 바스러질 것 같던 표지와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박스에 넣었다. 정말 대충 쌓여있던 책장에서 어렵게 발견했다. 벤의 유골함이 있던 방에서 십자가상과 목걸이 귀걸이 등을 챙겼다. 언니가 하던 것이라 가지고 싶었던 걸까. 새것들도 많이 있었다. 값이 나가거나 귀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스페인어로 된 성경책도 있었다. 기도문을 적어놓은 노트도 있었다. 외국에서 생활하면 종교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기도를 많이 하셨구나. 조카를 위한 기도도 많이 하셨고 동생을 위한 기도도 많이 하셨다. 본인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으신 것 같다. D가 그린 그림과 글도 찾아봐 달라고 했다. 강아지 배설물이 있었던 방에 큰 장롱과 책장이 휘어져 있었는데 거기 많은 스케치북이 있었다. 스케치는 뭐랄까…. 풍경화도 있었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반복되는 그림들도 있었다. 감동적이거나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특히 호수인지 강가인지 물가를 그린 것이 있었는데 나무와 주변 풍경들이 그럴싸해 보였다.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그림으로 많이 달래셨던 것 같다. 1차 항암치료를 하러 가시던 날도 병상에서 무료하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도구를 챙겨가셨었다. 1990년대부터 한국에 살았던 것 같다. 그 무렵부터 쓴 시와 에세이들이 아주 많았다. 주로 한국에서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들이 많았다. 영어로 쓴 필기체를 오랜만에 보았다. 간혹 한글도 보였다.
D는 한국말을 잘하지 못한다. 한국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사는 데 많이 불편하지 않아서였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만 써도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었고 불편함은 없을 정도의 아주 간단한 한국말은 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또 외국인을 보면 영어를 쓰려고 애쓰고 도와주려고 하니까. 특히 미국 백인들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