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갑니다.
미국에 있는 가족이 모든 일을 나에게 일임한다는 서류에 사인해야 한다고 했다. 사인. 사인. 너무 지겹다. 절차상 필요한 것이니 기다렸다. D의 여동생 E가 나를 위임한다는 위임장이 도착해서 이제 다 끝나는 줄 알았다. 미국대사랑 통화도 했다. 매우 빠른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너무 오랜만에 빠른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서 나도 엄청 빠르게 대꾸했다. 일은 빠르게 잘 진행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믿고 있었는데 그것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화장을 진행하려면 많은 서류가 필요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복잡한 서류들이었다. 대사관에 다시 전화해서 이 많은 서류와 일들을 내가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혹시 있는지 물어봤다. 대사관에서 지정한 장의사가 있는데 그분께 모든 걸 맡기겠냐고 한다. 미국의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럼 미국의 가족들이 이 장의사분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이 다시 필요하다고 한다. 오 마이갓. 미국과의 시간 차이 때문에 서류가 오가면 이미 이틀이 지난다. 그동안 D는 차디찬 영안실에 계속 있게 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급한데 미국의 가족들은 서류를 또 빨리 보내주지 않는다. 주말이 되어서도 답이 없어서 급한 마음에 대사관으로 전화를 했다. 담당자를 바꿔준다고 했다. 아마 주말이니 근무하는 날은 아닐 테고 민원이 들어올까 봐 개인 전화로 답을 해준 것 같았다. 상당히 짜증이 나는 목소리였다. 미국에서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고는 있는데 화장이라도 빨리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는 없나요. 하…. 왜 그러시는 거죠. 혹시 영안실 비용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네? 영안실 비용이요? 난 영안실 비용이 드는지도 몰랐다. 생각도 안 해봤다. 그게 아니라…. 선생님이 거기 계시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부질없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드디어 위임장이 도착해서 일이 진행되는가 싶더니 비용 발생 부분에서 다시 정지된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것이다. 장례를 치르는 데 이렇게 큰 비용이 들었던가. 유골함을 미국으로 보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D의 남편 B의 유골함까지 두 개를 보내야 해서 두 배로 비용이 든다. 예상되는 비용을 미국의 가족에게 얘기하니 그만큼의 돈이 없다고 한다. 조카는 펀드를 해서 돈을 모으겠다고 한다. D를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다 했다.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빨리 장례를 치러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또 일주일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한국에서 살았던 세월이 길었던 만큼 한국의 D를 아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주었다. 감사했다. 드디어 목표액이 거의 달성이 되었고 조카분의 돈을 조금 보태 화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화가 왔다. 다행이었다. 화장하는 날짜가 정해졌다고 한다. 무려 한 달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난날이었다.
드디어 차가운 영안실을 벗어나 화장하게 되는군요. D 정말 안녕.
기분이 이상했다. 막상 떠나보내려고 하니 너무 아쉽고 보내드리기 싫었다. 영안실에 계실 때는 너무 추울 것 같고 빨리 화장을 해서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막상 정말 화장을 하게 된다고 하니 안 했으면 좋겠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뉴스에서 몇 달 동안 엄마의 시신과 함께 살았던 어떤 분의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분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나도 그런 마음인 건가. 그러면 안 되지만 그 마음이 참으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함께 갈까요? 장의사분에게 여쭈니 혼자 가겠다고 했다. 내가 가족이 아닌 것도 알고 남인 것도 알아서 나를 헤아려 주신 것일까. 그저 직업이니까 그러신 것일까. 장의사분은 프로페셔널하셨다. 모든 절차를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뒤로 빠져계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대사관에 연락도 하지 마시고요. 그냥 계세요.
그동안 마음 졸이며 지냈는데 다 알아서 해준다니. 히어로인가. 마음이 놓이기도 한순간이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연락은 취하면서 미국으로 연락을 할 일이 있으면 부탁도 하시고 나도 진행 상황이 궁금하면 연락을 드리곤 했다. 한 번의 귀찮음이나 짜증 없이 늘 잘 말씀해 주셨다.
병원에서 D가 돌아가신 이후에 혹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전화할 수 있다고 해서 건네준 전화번호가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채 다음날부터 전화를 계속했다. 왜 화장이 안 되느냐부터 병원비 계산까지 얼토당토않은 질문도 많이 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런데 직책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 네 저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네 그렇군요. 이런 경우가 많이 있나요. 대부분 외국인이 돌아가시면 한국에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크게 될 것이 없었고 본국에도 가족이 없었던 한 경우에는 대사관에서 모든 것을 처리해 주었어요. 이번에는 일이 참 복잡하네요. 미국에 가족이 있어서 대사관에서도 섣불리 처리를 못 하고요. 가족분도 아니신데 신경 많이 쓰이시겠어요.
그 뒤로도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혹시 다른 방법이 없는지 계속 물어봤다. 네 알아볼게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안 된다는 것이었다. 늘 정말 친절하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정한 사회복지사이다. 이런 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주민센터도, 다문화센터도, 적십자도, 요양기관도, 건강보험센터도 모두 D의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외국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한국에 20년 넘게 사셨는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 허망했다. 사비를 들여서 도우미를 선정할 수는 있다고 해서 퇴원을 하면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돌아가시고 나서 다문화센터에서 전화가 왔었다. 전에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언제쯤 필요할지 묻는 전화였다.
네. 그런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또 며칠 후 서울의 입원했던 병원에서도 연락이 왔다. 2차 항암치료를 위한 입원 안내였다. 문자가 왔길래 전화를 해서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하니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에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정말 돌아가셨구나. 실감이 나던 순간이었다.
D의 통장에 있는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 미국의 가족들이 그래 주길 원했다. 들어서자마자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번호표를 들고 창구에 가서 저…. 하는 순간 눈물이 났다. 이 은행 사람들 모두 D를 알고 있었다. 외국인 할머니는 이곳에서 흔치 않았고 늘 은행에 직접 가서 모든 업무를 보셨기 때문에 아마 다 알고 계실 것 같았다. 돌아가셨다고 하니 모두 슬퍼한다. 계좌에는 접근할 수 없고 유일한 방법은 상속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코미디인가. 상속인이라니. 그래도 미국의 가족에게 가족이 머무는 주의 상속법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더니 조카에게 답이 왔는데 알아보지 않은 것 같고 상속인은 우리 엄마 그리고 나야. 이렇게만 답이 왔다. 다시 알아보니 가족이 아닌 내가 상속인이 되려면 미국의 법원에서 나를 상속인으로 지정한다는 서류가 필요하다고 한다. 서류라고 하면 넌더리가 난다. 그냥 포기해야겠다. 장의사분도 이 과정은 굉장히 복잡하고 혹여 된다고 하더라도 계좌에 접근이 안 될 수도 있다. 전에도 한 번 이런 경우를 봤다고 하면서 그냥 두는 게 낫겠다고 한다. 통장에 어마어마한 돈이 있는 것이 아니면. 그럼 그냥 두자.
미국으로 유골함을 보내려면 유족분들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공항으로 보내는데 작은 공항은 안된다고 한다. 처음에 알려준 공항은 작아서 안 된다고 했다. 가까운 곳에 조금 더 큰 공항이 있는지 물어보고 답변이 오고 또 장의사분께 전달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그동안 유골함은 잘 지내고 있었던 걸까. 드디어 컨펌이 나서 유골함을 보냈고 유가족들에게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는 남편인 벤의 유골함도 같이 가려고 했는데 문서상 문제가 생겼다. 여권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망신고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 돌아가신 지 몇 년이 흘렀는데 아직 사망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라니. 일단 D의 유골함이라도 먼저 보내자고 하고 떠나셨다.
미국으로. 고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