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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경 Sep 03. 2024

서울의 박선생님

그리고 착각

박 선생님을 알게 된 건 전화통화를 통해서였다. D의 몸 안에 알 수 없는 큰 덩어리가 있음을 알고 내가 원주의 병원을 예약하려고 전화했더니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다시 병원으로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사와 상의하던 중 서울도 괜찮으면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병원이 있다고 해서 전화를 부탁드렸었다. 다행히 며칠 안에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어레인지를 해 주셔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함께 죽을 먹으러 왔다. 서울에 혼자 갈 수 있겠냐고 했더니 조금 걱정이 된다고 했다. 혹시 서울에 아는 사람이 있냐고 했더니 박 선생님에게 전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나를 바꿔줘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많이 놀라신다. 선생님이 병원에 함께 가 주신다고 했다. D가 서울로 가는 날 많이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지난번 나에게 주었던 5만 원을 다시 돌려주며 택시 타고 가라고, 다녀와서 연락하라고 했다. 서울에서 많은 검사를 하고 영주로 다시 오셨는데 수일 내로 결과를 알려주는 전화가 올 거라고 했다. 며칠 후 나에게 전화가 왔다.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주신 분은 레지던트 선생님이신 것 같았다. 지금 D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고 했다. 요즘은 말기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말기 즉 4기이고 뼈까지 전이가 된 상태이며 암크기가 너무 커서 수술을 당장 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크기를 줄여나가고 이후에 수술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하신다. D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D에게 전화했더니 의사가 얘기해 주었는데 빨리 항암치료를 받아서 수술하고 싶다고 했다. 울거나 절망적이지 않은 목소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빨리 일하고 싶다고 했다. 가르치는 학생들도 보고 싶고 미국의 여동생에게 돈을 보내줘야 한다고 했다. 의지가 있으시니 차도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4기라고 하지만 이겨내는 분도 있다고 했다.   

   

1차 항암 치료받기로 한 날이다. 며칠 동안 입원을 해야 해서 짐을 챙겨 버스터미널로 모셔다 드렸다. 아이들도 같이 갔는데 500원짜리를 둘에게 줘도 되냐고 해서 그래도 된다고 하니 500원짜리 두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여준다. 해맑은 아이들은 옆에 있는 슈퍼에서 500원으로 살 수 있는 걸 사고 좋아한다.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신다. 그러다가 표정이 이내 불안해진다. 괜찮을 거라고 안아드렸다. 걱정되었다. 병실에 있을 때 통화를 할 때는 농담도 하고 목소리도 밝았다. 화장실을 못 가서 괴로웠는데 병원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검사와 치료는 아주 힘들지 않았다고 여기 사람들이 친절하게 잘해준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많이 힘들다고 하신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적이라 죽을 사다 드리고 나누어 드시도록 했다. 보통의 날들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통화를 이어갔다. 의지가 강했다. D는 빨리 나아서 다시 돈을 벌고 미국으로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가르치는 학생들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같이 산책하고 싶거나 이야기하고 싶을 때 전화하라고도 얘기했다. 먼저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돌아가시고 나서 몇 시간 뒤 대사관에서 아무 소식이 없길래 궁금해서 병원으로 전화를 해 보았다. 병원에서는 대사관에서 받은 전화가 없다고 했다. 병원비가 해결되어야 다른 절차들이 진행될 수 있다고 했다. 꽤 큰 금액이었다. 일단 D가 살고 있던 집의 보증금을 빼서 병원비를 내야 했다. 집주인에게 전화하니 흔쾌히 보증금을 주셨다. 어쨌든 그녀의 돈이니까. 병원비를 다 내고 대사관에 전화하는 등 생각보다 일이 굉장히 복잡했다. 바로 화장을 하고 유골함을 미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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