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는 일들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빨리 정리해 달라고 했다. 집을 내놓았는데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나는 노력은 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정리할 짐이 많고 혼자서 하기에는 큰 가구도 많아서 곤란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알아서 정리 빨리 부탁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주인분에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고 집 정리는 집주인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한 상태였다. 이사업체에 물어보니 견적이 꽤 나왔다. 두 어군데 물어봤는데 비슷했다. 집주인에게 장문의 글을 보냈는데 그래도 우리더러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 의무가 없는 거 같다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강아지 임시 보호도 해주고 보증금까지 내주었는데 이러면 곤란하다고 했다고 한다. 보증금은 애초에 D의 돈이었고 강아지는 맡아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집주인은 언제까지 비워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보증금을 우리가 쓴 것도 아니고 집주인 돈도 아닌데 계속 연락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다시 돌려주었다. 한순간에 인상 좋았던 집주인이 돌변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 변기 뚜껑이 없어졌다며 우리더러 변기 뚜껑 탈취범이라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마 D가 비데 설치를 하면서 뚜껑을 떼고 다시 가져다 놓지 않았거나 집안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니 그보다도 우리가 변기 뚜껑이 왜 필요해서 훔쳐 갔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품을 찾던 날 비데와 정수기가 있어서 혹시나 렌털을 하셨나 하고 정수기 옆에 붙어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보았다. 역시나 렌털을 한 상태였다. 사정을 말씀드리니 정수기를 늘 청소해 주시던 분이라고 하시면서 어떡해요…. 얼마 전에도 갔었는데…. 하며 울먹이신다. D의 남편 벤이 살아계셨을 때부터 오셨었다고 한다. 강아지도 많은 외국인이라 모두 피하던 집이라 본인이 계속했었다고 한다. 마지막에 오셨을 때 많이 아프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 데 불과 한 달도 채 안 되었는데 돌아가시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런 전화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지. 마음이 무겁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잠시 뒤 전화가 왔는데 우리더러 위약금을 내라고 하는 것이다. 아직 계약이 남아있는데 해지를 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우리는 계약이 되어있는 것인지도 몰랐고 미국에 있는 가족이 찾아 달라는 물건이 있어서 유품 정리를 하러 왔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본 것인데 위약금을 내기는 좀 그렇다. 위약금 문제는 다시 알아봐 달라고 했다. 갑자기 뒤쪽 머리가 아파온다.
강아지는 세 마리가 있었다. 한 마리는 피부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한 마리는 발랄한데 많이 짖는다. 한 마리는 크고 잘 생겼고 D와 가장 오래 지낸 사이라고 했다. 루크였다. 처음 응급실에 갔을 때도 혹시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했을 때 아주 힘겹게 루크.라고 발음했다. 루크에게 전화하고 싶어. 하지만 할 수 없어. 하며 희미하게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마침 집주인이 보내준 루크 사진이 있어서 보여주었다.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너를 기다리고 있대.라고 했더니 휴대전화 액정을 쓰다듬으려고 했다. D가 돌아가신 후 강아지들이 많이 걱정되었다. 내가 혼자 결정할 수는 없어서 가족에게 물어봤더니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한다. 참……. 어렵네.
늘 가시던 동물병원 원장님께 전화를 걸어보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소식을 전한 이후로 처음이다. 알아봐 주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피부병을 앓고 있는 아이는 데려가서 치료하며 보호해 준다고 하셨고 발랄하지만, 많이 짖는 아이는 원래 있던 애견센터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두 마리 모두 잠시 뒤에 데려갈 테니 빗장을 풀어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럼 루크는 어떻게 하죠. 음.... 루크는 너무 크고 고집이 있어서 입양이 힘들 것 같아요. 유기견 센터로 보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반려견을 키우지 않지만, 유기견 센터에 대한 안 좋은 뉴스는 많이 접했던 터라 걱정이 되었다. 입양이 되지 않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락사를 시킨다. 영양공급이 잘 안 된다. 학대한다…. 등등. 걱정되어 집주인에게 얘기하니 본인도 강아지를 키우고 두 마리를 키울 형편은 안되니 유기견 센터로 보내야 할 것 같다고 하신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일까.
하루 뒤 집주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루크가 원래는 음식을 주어도 먹지도 않고 쳐다도 안 보고 정을 주지 않았는데 오늘은 눈을 보기도 하고 먹는 것도 받아먹었다는 것이다. 며칠 더 데리고 있어도 될 것 같다고 하신다. 유기견 센터에 이미 얘기를 해 놓은 상태라 다시 전화를 해보겠노라고 했다. 유기견 센터에 사정을 얘기하니 그분께서 맡아서 끝까지 키울 것이 아니면 지금 보내야 한다고 하신다. 정이 들면 루크에게 더 안 좋은 기억만 심어줄 것이고 그럼 스트레스가 더 심하리라는 것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루크의 입장에서는 이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집주인분에게 말씀드리기 끝까지 데리고 있을 자신은 없다고 하신다. 루크는 그다음 날 유기견 센터로 가는 차를 타고 떠났다. 루크에게 얘기해 주었다. 잘 먹고 잘 지내라고 D는 돌아가셨다고. 슬픈 눈을 하고 떠났는데 잘 지내고 있을까.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증금을 다시 집주인에게 돌려준 얘기와 유품을 찾은 이야기 이것을 보내려면 드는 우편비용 등에 관한 이메일을 길게 써서 보냈다. 유품을 찾으면서 심적으로 힘들었고 집주인과 씨름하며 상처받은 일들에 관해서도 썼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다. 해가 바뀌어서 한 번 더 이메일을 보냈다.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다. 주소를 알려주면 바로 보내주겠다. 그러나 그 어떤 이메일에도 아직 답장이 없다. 여동생 E에게서도. 조카 A에게서도. 남편은 더 기다리지 말고 그냥 버리자고 한다. 주변 사람들도 그러라고 한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