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동을 끝내고 건물 밖을 나서자마자 후텁지근한 바람이 온몸을 덮쳐왔다. 실외기 앞에 서 있는 줄 알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냥 세계 전체가 거대한 실외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뒷목에 흐르는 땀을 대충 트레이닝복에 문질러 닦고는 텁텁해진 입안을 혀끝으로 쓸었다. 연일 폭염이 지속되던 7월, 그녀는 전에 없던 살기를 느꼈다. 누군가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있던 티셔츠와 스포츠 브라를 벗으려고 자세를 잡았다. 이미 땀과 브라는 단단히 결착된 후였다. 한쪽 팔을 쭉 뻗어 올리고 다른 팔로 가슴 밑에 위치한 단단한 밴드를 최대한 늘려 살갗과 브라가 떨어지도록 낑낑거렸다. 쉽지 않았다. 등줄기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가슴 밑에 고여있던 땀들이 갈비뼈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민은 사치였다. 그녀는 싱크대로 곧장 걸어가 고기를 자르던 주방 가위로 가장 견고한 스포츠 브라의 밴드를 댕강 잘랐다. 브라에 묶여있던 유방과 한숨이 길게 아래로 쏟아졌다. 이렇게 또 멀쩡했던 스포츠 브라가 사망했다. 브라는 검색에 검색을 거쳐 구매했던 쇼크업소버의 6만원짜리 러닝 브라였다.
브래지어 조각들을 대강 수습해 쓰레기통에 넣고, 욕실로 직행했다. 가슴 밑에 울긋불긋하게 올라온 자국들을 응시했다. 그녀에게 여름은 늘 가슴 밑 불긋한 발진들과의 싸움이었고, 그 전쟁이 다시 재개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전투를 함께할 또 다른 브라를 찾아야 했다. 잘라낼 수 있다면. 그날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잘라내었다. 그녀는 자주, 틈틈이 그런 꿈을 꾸었다.
#2.
눈을 뜨니 새벽 2시쯤이었다. 격한 운동을 마친 밤에는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가 갈증으로 인해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여름에만 닥치는 증상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스탠드의 불을 켰다. 잠옷을 벗고, 오버사이즈의 먹색 반팔티와 고무줄 반바지를 대충 걸친 채로 아파트 단지 바로 밑에 있는 GS25의 문을 열었다.
‘딸랑’
곧장 음료수가 진열된 냉장고에서 빅토리아 탄산수와 2L 생수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카운터에 약간은 앳되어 보이는 20대 중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5500원이요.’
말없이 핸드폰을 태그하고 가볍게 목례한 뒤, 탄산수와 생수를 챙겨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목 뒤로 길게 늘어지는 인사를 듣는둥 마는둥하며 매장을 서둘러 나왔다. 가슴에 안은 탄산수와 생수의 냉기로 인해 손과 명치가 차가웠다. 냉기는 몸에 스며들어 가슴께가 살짝 젖어있었다.
근데, 노브라인거 눈치를 챘으려나?
#3.
“이름이 뭐야?”
“유나비.”
“... 우리 반에 그런 이름 없는데?”
그녀는 슬쩍 미소지었다. 그냥 그렇게 부르면 돼. 그녀는 나비로 불리우길 바랐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가벼워지고 싶다’는 말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참을 수 없는 부피의 성가심이었다. 그녀의 하중은, 가슴과 엉덩이와 팔뚝은 언제나 그녀를 지하로 내리꽂았다. 일주일 가까이를 밥을 먹지 않고 버텨봤지만, 빠지는 것은 대부분 뱃살과 얼굴살이었고 그녀가 목표했던 가슴과 엉덩이와 팔뚝의 지방은 늘 비장하게도 그녀의 몸을 지켰던 것이다. 그녀는 승복해야 했다.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에 승복해야 했고, 육중한 그녀의 부피에 승복해야 했다. 그녀는 인생의 대부분 통통했지만, 가장 말랐던 시절에도 체지방률 30%를 웃돌았다. 역시 그녀의 엉덩이와 가슴이 한 일이었다.
가슴과 엉덩이가 큰 나비를 본 일이 있는가. 여름 하복의 반소매, 그러니까 팔뚝과 팔꿈치 사이에 어정쩡하게 떨어지는 그 소매의 끝은 항상 팔뚝 지방으로 꽉 차 있었다. 그곳에 구멍이 나지 않는 여학생들은 나비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여름을 싫어하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찬 반소매와 가슴께에 붙은 세 번째 단추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그 흉물스러움을 그녀는 하복을 입는 내내 참고 참아야 했다. 나비가 되고 싶었다. 나비의 납작함, 나비의 가벼움, 나비의 상쾌함. 언제부터 갈망해왔던가. 될 수 없는 것. 느낄 수 없는 것.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4.
그녀는 칼을 빼들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곤 왼쪽 가슴 한쪽을 위에서부터 썰어 내려갔다. 어쩐지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꿈이겠지. 안심한 채로 늘 그래왔듯 천천히, 살갗을 파고드는 서늘한 칼날을 느꼈다.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칼을 쥔 손등, 팔 전체가 찐득한 혈액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틀었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을 겨우 떠보니 이미 바닥은 온통 피칠갑이었다. 손, 팔, 배, 다리... 온 몸에 피가 묻어있었다. 이대로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더듬 더듬 손을 뻗어 핸드폰으로 119를 눌렀다. 자해를 손목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여자도 있나.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웃겨 배가 아팠다.
“거기,,, 119죠? 여기 미래아파트 1101동 1001호인데요... 빨리 좀 와주세요. 아 비밀번호는 2401이니까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세요. 문 부시지 말고요. 여기 월세라서....”
멀리서부터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든 그녀의 손등에 하얀 나비가 내려 앉았다. 팔랑이던 날개에 끈적이는 혈액이 달라붙어 날갯짓이 느려지고 있었다. 천천히 더 천천히...흐려져가는 의식을 붙들으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계속 붉은 날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