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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슥슥 Nov 11. 2022

정신과 의사가 내게 말했다


백수가 되니 역시나 긴장이 풀린다. 오늘도 옷 정리를 하겠다고 계획했으면서 오전 내내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잠이 많아진 건 게으름일 수도 있겠지만 이틀 전 발작 같은 불안 증세가 생겨 처방받은 약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오늘도 병원 예약이 아니었다면 종일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고 밖을 걸으니 가을의 농익은 냄새가 났다. 상쾌했다. 늦잠을 자는 것보다 오후에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만족스러웠다. 가을을 만끽하고 싶어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며 걸었다. 그러면서 몸에 덕지덕지 묻은 어두운 감정도 털어냈다. 내면이 시끄러운 사람에게 샤워와 산책은 언제나 힘이 된다. 오늘도 이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병원까지 걸었다. 




단 이틀 정도 약을 챙겨 먹었을 뿐인데 불안 증세는 놀라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정신과 약을 처음 먹어본 터라 내성 없이 약효가 더 잘 나왔던 건지도 모른다. 심장의 두근거림 없이 푹 잤고 불쑥 튀어 나온 부정적인 상상도 의지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정말이지 괜찮았다. 




이틀 만에 만난 의사에게 내 호전 상태를 전했다. 다행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저것 가벼운 질문을 추가로 던졌다. 이틀 전과 다르게 다행히 오늘은 떨림과 눈물 없이 전할 수 있었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흰머리가 성성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퇴사라는 결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결정을 하기까지 에너지 소모를 너무 크게 한 것 같아. 이제 출발선에서 새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이미 에너지를 다 썼어. 그러니 갑작스럽게 약한 부분에 문제가 생긴 거지."



내가 대답이 없자 의사는 말을 이어갔다.



"싫어하는 일을 왜 억지로 계속해. 좋아하는 일을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게 뭐가 잘못됐어. 그리고 선택했으면 옳게 만들어가면 되는 거지. 지금 시작 단계자나.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데 옳고 그름을 어떻게 알아. 결과가 나왔을 때 판단해도 늦지 않아. 
게다가 이제 30대 중반인데 좀 실패하면 어때. 두 번 세 번이고 고꾸라져도 재기할 수 있는 나이 고만." 




허허. 어째 훈계조가 되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호기로웠던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나의 몸은 나약했음을.

퇴사 후 새로운 걸 해보겠다고 블로그에도 남기고 여러 이웃들에게 응원도 받았건만 우습게도 내 몸은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던 거다.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몇 주간 두통에 시달린 것도 뇌의 과부하 신호였지만 나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그동안 회사를 나가기 위해 온 에너지를 쏟고 있던 거였다. 




나에게 내려진 두 번째 처방은 허무할 정도로 심플했다. 

'체력 회복' 

이를 위해 해야 하는 건 모두가 아는 바로 그 두 가지였다. 1) 규칙적인 생활과 2) 운동

너무 뻔해서 순간 반감이 들었지만 청개구리가 되어서 좋을 게 없었다. 생활패턴이 깨져 늘어질수록 자책만 커질게 분명하니까. 그런 의미로 내일의 할 일은 (우습지만) "일찍 일어나 아침 먹고 옷 정리하기"로 정해보았다. 행거가 무너진 뒤로 여름옷과 겨울옷이 여기저기 뒤엉켜있는데 이를 깔끔히 정돈해야 의욕이 살아날 것 같아서다. (감정은 분명 환경에 영향받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내일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드디어 옷 정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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