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온 지 2주가 지났다. 이사할 때 챙겨야 하는 행정 업무 체크리스트는 런던에서 이사하기I에 상세하게 기록했고, 여기서는 이삿날과 이후 겪은 당황스런 사건을 적어본다.
이사는 목요일(1월 28일)에 했지만 월요일(1월 25일)이 계약일이었고 열쇠를 받으러 왔다. 자체 소독을 하고 며칠 창문을 열어둔 후 들어오려고 일부러 이삿날을 좀 늦게 잡았다. 어차피 에어비앤비 체크아웃 날짜가 여유 있었고 플랫메이트 유진이도 기숙사를 월말까지 예약한 상태였다. 입국하기 전에 계약을 한 집이라 열쇠를 받고 처음으로 집을 확인했다. 입주하기 전에 professional cleaning을 하는 게 필수지만 서양 사람들의 깨끗함의 기준이 우리와는 다르다. 청소 상태는 별로였지만 이 날 대청소+자체 방역을 하려고 소독제와 키친타올 등을 잔뜩 챙겨왔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다.
문제는 매트리스였다. 눈으로 봐도 움푹 꺼진 게 보여서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보니 이건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매트리스가 아니었다. 다른 문제라면 차차 해결해도 되지만 매트리스는 이사 당일부터 써야 하는데 빨리 조치를 취해야했다. 바로 에이전트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건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매트리스가 아니다, 당장 사용해야 하니 집주인에게 바꿔달라고 전달을 요청했다. 유진이가 발빠르게 괜찮은 매트리스를 검색했고 링크를 보내 이걸로 주문할테니 비용을 달라고 해서 다행히 허락을 받았다. 이삿날 배송되도록 주문해 다행히 바닥에서 자는 일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가구 품질이 좋지 않았다. 큰 방에 있는 나무 책상은 바퀴가 다 망가졌고 세트인 듯한 의자는 흔들렸다. 화장대는 조잡한대다 거울이 분리되지 않아 다른 용도로 사용이 불가했다(유진이와 나 둘 다 화장대는 필요없었다). 작은 소가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디서 구한 건지 궁금할 정도로 감각이 떨어졌다. 식탁은 네 모서리에 의자가 쏙 들어가는 디자인인데 모서리에 앉아야 하고 의자도 대각선으로 앉아야해 은근히 불편하다.
다행히 나무 책상과 의자는 버려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고 제대로 된 책상 두 개를 장만했다. 보기 싫은 소가구들은 발코니로 몰아내고 화장대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물건 올려놓는 용도로 쓰고 있다.
이삿날 우리를 가장 당황하게 한 건 주방 가전이었다. 집주인의 취향과 센스에 영향을 받은 가구와는 달리 가전제품은 빌트인이라 다행히 좋은 제품이었다. 전자렌지, 오븐, 전기렌지, 식기세척기, 와인 냉장고까지 갖춰져 있어 흡족했다.
문제는 점심을 먹을 때 발생했다. 정리를 하다 배가 고파 근처 M&S에서 ready-meal을 하나씩 사와 전자렌지에 돌려먹기로 했다. 유진이가 사온 토마토 라비올리를 3분 30초 돌리고 내가 사온 크림 스파게티를 돌리는데 갑자기 전자렌지가 꺼졌다. 이것저것 눌러봐도 안 돼 일단 작동하는 전기렌지에 냄비를 올려 데워 먹었다.나중에 냉장고도 꺼져있는 걸 발견하고 세탁실에 있는 두꺼비집을 열어보니 주방 쪽 전기 차단기가 내려간 거였다. 다시 올리자 냉장고도, 전자렌지도 다시 켜졌다.
저녁에는 둘 다 너무 피곤해 단팥죽으로 저녁을 떼울 요량으로 전자렌지를 돌리는데 다시 꺼졌다. 보니까 또 차단기가 내려간 상태. 하... 식기체적기를 돌리니 또 내려가고. 전자렌지, 오븐, 냉장고, 와인 냉장고, 그리고 전기 콘센트 두 군데가 다 하나의 배선에 연결된 거다. 식기세척기를 켜놓고 자다 차단기가 내려가면 냉장고도 꺼져버리니 포기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오후 늦게 전기 기사가 방문했다. 난 회의 중이라 보지 못했는데 주방의 모든 가전을 틀어놓고 한참 가동을 해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잘 작동하니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너무 여러 기기가 한 곳에 연결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문제는 다 빌트인이라 우리가 바꿔 연결할 순 없다는 것. 그 뒤로 한 번 또 차단기가 내려가고 그 뒤로 열흘이 넘도록 아직 다시 문제가 생기진 않아 그냥 지내고 있지만 계속 신경이 쓰인다.
이 집에는 환풍기가 세 군데 있다. 각 방 화장실에 한 개씩, 그리고 주방 천장에 하나(전기렌지 위 환풍기는 따로). 근데 이 세 개가 모두 24시간 돌아간다. 분명 다 스위치가 따로 있는데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봐도 꺼지지 않는다. 환기가 잘 안 되는 고층 빌딩도 아니고 발코니까지 있는 일반 가정집에서 굳이 공기 순환을 이렇게까지 시킬 인인가. 환풍기 소리가 꽤 크게 들려 회의할 때나 잘 때 화장실 문을 꼭 닫아야 한다.
그밖에 바깥 출입문 센서키 하나가 갑자기 먹통이 된 것, 발코니에 있는 화분 4개를 분명 곧 가지러 온다고 해놓고 감감 무소식인 것 등의 사소한 문제가 남아있다. 발코니에는 식물이 들어있는 화분 4개 외에 빈 화분도 서너 개가 더 있다. 그것도 엄청 크고 무거운 걸로. 제발 가져가든지 버리게 해줬으면... furnished apartment(가구가 비치된 집)의 세입자로 흔히 겪는 설움이다. 그래도 집 자체는 좋고, 동네 조용하고, 옆집 소리도 안 들리는 걸 보니 방음도 잘 된다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얼추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