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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Mar 05. 2021

코로나 시대의 동거

동거인이 생겼다

동거인이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산다. (2019년 더블린에서의 악몽 같은 두 달은 내 기억에서 지웠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워낙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중요해 비싼 월세에도 혼자 집을 구했었다. 더블린에서 호되게 당해 두렵기도 했고, 2020년 락다운을 두 달 겪고 나니 코로나 시대에 1인 가구로 지내는 게 얼마나 무섭고 불안하고 심심한 일인지 알겠더라. 코로나보다 우울증에 먼저 걸릴 것 같아 서울로 피난 갔으니. 운 좋게도 대학 친구 유진이가 2020년 9월부터 런던 유학이 예정되어 있어 같이 살기로 의기투합. 그렇게 플랫메이트(flatmate)가 생겼다. 


살림꾼

함께 지낸 지 며칠만에 알았다, 유진이는 살림꾼이구나. 이삿날 각자 가져온 식기와 주방 도구 자리를 찾아주며 빈 상자 정리도 하고 가구 재배치를 주도했다. 택배가 오면 바로바로 가져와 언박싱과 쓰레기 분리까지 일사천리다. 

집을 보러 왔을 때부터 끼익끼익 소리 나는 방문이 거슬렸는데 기름칠을 할까 말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았던 나와 달리 경첩에 핸드크림을 쓱쓱 바르면서 이러면 좀 소리가 안 나는 것 같다고 한다. 맥가이버다. 화장실 환풍기가 잘 돌아가는지 스위치를 껐다 켜도 알 수가 없었는데 의자를 밟고 올라가더니 화장실 휴지 한 칸을 환풍기에 갖다 댄다. 환풍기가 켜져 있으면 휴지가 달라붙는다고. 천잰데?


스콘 위에 뿌려먹으려고 사온 커스터드 크림이 따개가 없는 구식 캔이라는 걸 깨닫고 열 방법이 없어 좌절했을 때 드라이버로 두드려 따준 날의 감동은 사진으로 남겨야 했다. 진짜 맛있게 먹었다.




먹는 데 진심인 편

먹는 낙밖에 없는 락다운 생활에 다행히 유진이와 식성이 잘 맞았다. 둘 다 싱겁게 먹는 편이고 소식한다. 잡곡밥을 좋아하고 화이트 와인을 더 즐겨 마신다. 라면이나 과자는 잘 찾지 않는다. 저녁에 많이 먹으면 부담스러워서 점심을 제대로 먹고 저녁은 가볍게 먹는 걸로 자리 잡았다. 

물론 다른 점도 많다. 난 커피를 매일 마시고 유진이는 홍차를 주로 마신다. 난 아침으로 토스트를 주로 먹는데 유진이는 요거트나 과일, 샐러드를 먹는다. 유진이는 케익류를 좋아하고 난 당이 떨어지면 초콜릿을 먹는다. 난 고등어를 좋아하는데 유진이는 기름진 생선이나 굴 등 비린내 나는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치즈는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둘 다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유진이는 양파를 넣은 떡볶이를, 난 깔끔한 떡볶이를 더 좋아한다. 


둘 다 맛있게 먹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 좋은 재료로 요리해서 플레이팅까지 예쁘게 해서 먹는 재미가 있다. 설날에는 유진이가 인절미를 만들어 해외에서 잘 못 먹는 떡을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4시간의 시차

한 공간에 있지만 우린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산다. 원래 아침형 인간인데 영국으로 오면서 시차적응을 안 한 채로 굳어져 난 새벽 4시쯤 하루를 시작한다. 전날 저녁 돌린 식기세척기에서 그릇을 꺼내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스트레칭을 하고 글을 쓰거나 일을 하다보면 8시쯤 유진이가 일어난다. 저녁 8시쯤 내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 책을 보다 잠드는데 유진이는 12시쯤 잠자리에 든다고 하니 우리 사이엔 4시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오전 4-8시는 나만의 시간, 오전 8시-오후 8시는 함께 하는 시간, 오후 8-12시는 유진이의 시간. 같은 공간을 살지만 다른 시간을 사는 동거다. 


매주 토요일엔 함께 영화 한 편을 보는 걸로 무비 나잇(movie night)을 잡아서 다음 주엔 무슨 영화를 볼까 어떤 음식을 해먹을까 고민하고 기대하고 함께 코로나 시대의 런던을 살아가고 있다. 2020년 런던에 오자마자 닥친 코로나로 어렵게 쟁취한 런던살이를 포기하고 2021년 다시 돌아온 런던에서도 여기가 런던인지 느낄 수도 없는 집콕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어 버틸 만하다. 코로나가 나에게 가져다준 유일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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