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두 번째 단편집
옴팔로스(Omphalos)는 그리스어로 배꼽을 뜻한다. 옴팔로스에 그려진 세상은 배꼽이 없는 인간, 나이테가 없는 나무가 존재하는 불과 9000년 전에 창조된 우주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지지한 젊은 지구 창조설(Young Earth creationism)을 뛰어난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나이테는 지금으로부터 8912년 전에 형성된 것입니다. (...) 그 시대에 있었던 모든 나무의 중심에는 둥글고 아무 무늬도 없는 등질의 목심이 존재할 뿐이며, 나이테가 없는 이 부분의 지름은 천지창조의 순간에 생겨난 해당 나무의 크기를 나타냅니다.
주인공 모렐 박사는 고고학자로 신의 창조 목적을 발견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연구에 매진한다.
우리의 항해 수단은 과학적 탐구이며, 제가 과학자가 된 것 역시 우리를 창조한 당신의 목적을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나의 임무는 주의 역사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말게 하소서.
모렐 박사의 신념을 흔드는 위기가 찾아온다. 인류를 창조한 게 신의 의도가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한 천문학자의 논문을 보게 된다. 논문에서 제시한 설득력 있는 가설은 두 가지다. 인간이 주된 창조를 위한 연습으로 시행된 실험이거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라는 것. 모렐 박사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자신의 삶과 일을 고민하고 결국 발굴 현장을 떠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수는 모렐 박사의 마지막 기도에 있다.
주여, 저는 지금껏 제 삶을 우주라는 경이로운 메커니즘의 연구에 바쳤고, 그 과정에서 큰 성취감을 얻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당신의 의지와 저를 만든 당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해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저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가 느낀 성취감은 순전히 저의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제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이 자신에게 소명을 주었다는 믿음이 깨지고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거쳐 모렐 박사는 스스로 일어설 이유를 찾아낸다.
설령 인류가 우주가 창조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우주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이런 탐구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로서 신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모렐 박사의 마지막 말보다 더 멋지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할 수 있을까.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에 나온 말이 떠오른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프리즘은 두 평행우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기기다. 프리즘으로 연결된 두 세계는 동일한 상태로 시작하지만 날씨와 같은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흘러 아주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프리즘을 이용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나의 평행자아와 소통이 가능하다.
히틀러의 집권을 저지하고 싶어하는 가상의 시간 여행자에게, 최소한의 간섭은 요람에 있는 어린 아돌프를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 싶으면 그가 수태되기 한 달 전으로 돌아가, 산소 분자 하나만 교란시키면 된다.
프리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된다. 상담사 데이나를 찾아온 테레사는 몇 년 전 청혼을 거절한 앤드루와 결혼했으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알아볼까 고민하지만 선뜻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내가 찾고 싶은 건, 앤드루와 결혼했지만 내게는 맞지 않는 남자라는 걸 깨닫고 이혼한 버전이에요. 찾게 될까봐 두려운 것은, 앤드루와 결혼했고 지금 더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버전이고요.
공감이 가지 않나? 점을 보러 가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답을 이미 갖고 그 선택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간다. 평행자아가 자기보다 즐겁게 살고 있다고 강박적으로 걱정하는 사람 등 프리즘 중독자 모임까지 생겨난다. 자기와 전혀 다른 조건의 사람에게는 질투심을 잘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나라면 다르다.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었는데, 하며 후회와 원망과 질투로 인생을 망칠 게 뻔하다.
수많은 평행우주에 여러 버전의 평행자아가 각기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데 과연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역시 자유의지를 건드리고 있다.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은 상황에서 그걸 돌려줄 수도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해보자. 큰 범죄도 아니고, 보통 사람이라면 어느 쪽이든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어느 평행우주에서는 분명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선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의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하니까요. (...) 이 세계에서 당신이 선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미래에 분기될 세계들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미래에 분기될 더 많은 평행세계에도 더 나은 버전의 당신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을 보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평행우주에서 내가 거스름돈을 돌려준다고 해서 다른 평행우주에서 돌려주지 않는 걸 막을 방법은 없지만, 내가 선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더 나은 내가 되어 미래의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다.
『숨』전체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자유의지와 결정론.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내 선택과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의욕을 잃을 거라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질 거라는 사람도 있다. 역시 같은 사건과 배경도 결국 각자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이것도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 테드 창은 이미 정해진 결론을 향해 걸어가는 거라고 해서 그 과정이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