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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Sep 22. 2021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동거생활의 끝을 잡고

수십 번에 걸친 상담과 열 번은 한 듯한 Insights Discovery 검사(MBTI와 같은 이론에 기반한 심도 있는 성격검사)로 지금은 나름 self awareness가 높아졌다고 자부하지만 나를 모르는 날들이 길었다.


오랜 시간 후에 알게 된 건 내가 이별에 젬병이라는 것. 그동안 내 기준으로 사겼던(사겼는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제각각이더라) 남자들과 깔끔하게 이별한 적이 없다. 헤어진 다음에 다시 만났던 경우가 더 많았고 (헤어져 있던 기간이 만난 기간보다 길었던 경우도 있었다) 다시 만나진 않아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로는 친구로 계속 지내자는 쿨한 말로, 때로는 술김에 건 전화로. 


내가 왜 이러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나름 찾았던 이유는 '이렇게 좋은 사람을 인생에서 아예 잘라내긴 아까워서', '인연은 다 소중하니까'였다. 하지만 결국 헤어짐에 서툴다는 게 결론. 친구가 고백했을 때, 안정적인 그 관계를 잃기 두려워 거절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다. 친구 사이는 영원할 줄 알았나보다.


이별을 심히 두려워한다는 걸 제대로 깨닫게 해준 건 사람이 아니라 회사(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이직을 결심하기 위해 상담까지 받으면서 나는 회사와의 관계도 끊지 못하는구나, 깨달았다. 구글을 그만둔 후에도 1년에 수차례 사무실을 방문하며 끈을 놓지 못하는 나를 보며, 헤어진 전 남친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인연이라 연결고리를 부여잡는다.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도, 구글 사람들과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것도, 심지어 구글 주식을 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도, 다 같은 이유다. 내 꼴을 보아하니 에어비앤비에도 매달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런 성향으로 물건도 잘 버리지 못한다. 다행히 쇼핑을 싫어해 소유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진 않지만, 줄지도 않는다. 고등학교 교복을 고이 간직하고 있고 수업시간에 주고 받은 (이름도 없어 이젠 누구한테 받은 건지도 알 수 없는) 쪽지도 여러 상자다. 어릴 때 좋아했던 오락기와 보드게임은 꺼내보지도 않지만 버리지도 않는다. 좋아했던 과목의 교과서와 정리 노트, 심지어 숙제로 제출한 리포트 등 부모님댁 내 방 붙박이장 꼭대기 칸은 모조리 보물상자들 차지다.


이런 내가 플랫메이트 유진이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다. 내가 먼저 3개월 일정으로 한국에 들어가고 유진이는 2주 후 아예 귀국하는 거라 곧 한국에서 만날 거고 앞으로도 얼굴 보고 살겠지만, 우리의 런던 동거생활은 끝이 난다. 3개월 후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올 거라 나의 런던살이가 끝나는 건 아니지만 유진이가 없는 내년의 런던은 아주 다를 거다. 우리의 햄프스테드 아파트, 햇살 좋은 날 프림로즈힐에서의 피크닉, Waitrose 장보기, 매번 모니터를 옮겨 함께 본 주말의 슬의생과 함께 해먹은 수많은 요리는 이제 없다. 무엇보다 성인이 된 후 누군가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더없이 소중한 9개월이었다.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지만 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와 짐 정리와 냉장고 파먹기로 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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