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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Jan 18. 2022

긴긴밤

동화가 이렇게 '딥'할 일이야?

읽으면서 네 생각이 많이 났어. 우리 생각.

영국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 나의 런던 동거인이 『긴긴밤』을 건네주며 말했다. 런던으로 향하는 기내에서 책을 펼치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다. 코뿔소 노든이 코뿔소 앙가부, 펭귄 치쿠, 그리고 책의 화자인 이름 없는 펭귄과 인연을 맺으며 만들어가는 삶의 여정을. 



코끼리 고아원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고 어렸을 때는 스스로를 코끼리라고 믿었다. 안전한 환경에서 좋은 코끼리들의 보살핌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선택의 순간, 고민한다. 이대로 평생 여기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망설여졌다. 왜 긴 코 대신 뿔이 있는지 궁금했고 다른 코뿔소들을 만나고 싶기도 했다. 이때 무리가 따르는 현명한 할머니 코끼리가 말한다.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그래도 끝까지 망설이는 노든에게 코끼리들이 말한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좋은 환경과 좋은 사람들을 떠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로 눌러앉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그 안락함과 익숙함을 내던지고 두려움에 맞서야 할 때도 있다. 



마지막 흰바위코뿔소

혼자서는 코뿔소가 될 수 없었다. 노든이 코끼리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코뿔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코뿔소들이 있어야만 했다. 다른 코뿔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노든을 코뿔소답게 만들었다. 


노든은 바깥 세상에서 코뿔소들을 만나 아내를 얻고 딸도 낳아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 사냥꾼에게 아내와 딸을 잃기 전까지. 노든은 인간에게 복수하겠다는 분노를 품고 산다. 


복수심만으로 살아가는 노든의 잠 못드는 '긴긴밤'을 치유해준 건 동물원에서 만난 코뿔소 앙가부다. 성만 내던 노든에게 "낮에 심술을 부리니까 밤에 악몽을 꾸지"라며 대화를 하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동물원을 함께 탈출하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해준다. 하지만 앙기부가 뿔을 노린 사냥꾼에게 목숨을 잃으며 노든은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되고 만다.  



파라다이스 동물원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펭귄 치쿠와 윔보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알을 발견하고 함께 품는다. 아빠가 된다는 설레임과 두려움을 안고. 어느 밤, 전쟁으로 인한 폭격에 윔보는 알을 품다 죽고 치쿠는 그 알을 구하기 위해 노든과 동물원에서 도망친다. 치쿠는 알을 무사히 부화시키고 바다를 찾겠다는 목표를 말하고 노든은 치쿠를 바다로 데려다 주겠다고 결심한다. 


때로는 나를 넘어선 목표와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나를 일으킨다. 

나의 행복을 좇는 삶을 살고 있지만 사실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삶이 더 행복할 걸 안다. 


치쿠는 정말 불만이 많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노든은 성질 더러운 펭귄 치쿠가 좋았다. (...) 노든은 치쿠의 화내는 모습이 재밌었다. 치쿠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걷고 있으면, 이 모든 하루하루가 평범한 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정말 그렇다. 꼭 내 고민을 털어놓고 같이 해결해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다.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봐."


코뿔소의 바다

치쿠와 윔보와 노든의 사랑을 먹고 자란 이름 없는 펭귄은 펭귄이 되기 위해 바다로 떠난다.

"너는 펭귄이잖아. 펭귄은 바다를 찾아가야 돼."
"그럼 나 그냥 코뿔소로 살게요. 노든이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니까 내가 같이 흰바위코뿔소가 되어 주면 되잖아요."
(...)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나는 코뿔소지 펭귄이 아니라고."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읽으면서 내가 치쿠, 유진이가 노든이 되었다가, 또 어떤 장면에서는 노든에게서 나를 보기도 했고 이름 없는 펭귄이 되기도 했다. 

무슨 어린이 문학이 이렇게 감동적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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