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에서 심리상담 수업을 들을 때에도, 임용시험 공부를 할 때에도 상담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청소년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때문에 언어를 매개로 하는 상담만을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유아기를 넘어선 보통의 초등학생들은 모두 유창하게 한국말을 구사합니다. 그러나 상담실에서 마주하게 된 현실에는 자기 생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초등학생은 거의 없더군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는 것과 자기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어요. 게다가 제가 배웠던 상담의 중요한 결과물은 내담자의 '통찰'입니다만, 그 '통찰'을 초등학생에게 기대하는 것도 허황된 일이었습니다.
발령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1학년 남학생이었는데,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라면서 꽤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진지한 학생에 태도에 덩달아 열심히 들으며 메모를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뭔가 이상했어요. 사건의 순서가 뒤죽박죽이었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아직 어린 학생이다 보니 표현력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경청했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학생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말이 길어지면 길어지는 대로 다 들어주던 때였거든요. 그렇게 상담시간 40분 중에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할애했을까요? 학생이 반전 있는 고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꿈에서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얼마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알고 보니 꿈!' 이라니, 귀엽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어찌나 허무하던지 그때 느낀 허탈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꿈 이야기를 통해 아이를 이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저에게는 '아동 상담에 대해서 나는 기역, 니은도 모르는 상태구나'라는 무력감을 느끼게 한 사례였습니다. 배운 것은 언어로 하는 상담뿐이니 1학년이든 6학년이든 대화로만 접근을 했습니다. 6학년 정도 되면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사례도 있었지만 저학년 학생과 통찰을 향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통찰을 이끌어내고, 내담자는 자신의 답을 찾아나가는 그런 이상적인 상담은 말 그대로 이상에 불과했죠. 애초에 통찰이라는 것이 초등학생 대상으로 적용이 되는 말인가 싶었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언어로만 상담을 하는 것은 학생과 저 자신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배운 대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좌절했고,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해나가야 할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언어로만 상담을 이끌어가려는 상담선생님을 만난 어린 학생들에게도 그 시간은 분명 편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배운 것을 잘 써보겠다고 했던 질문들이 학생들에게는 어려웠을 것이고, 제가 답답함을 느꼈던 만큼 학생들도 그 시간이 답답했을 것 같아요. 그 생각을 하면 그때 만났던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때는 학생을 돕고 싶은 마음도 물론 컸지만, 그만큼 '배운 것을 잘 써먹어야겠다, 빨리 아이가 좋아지는 성과를 내고 싶다'는 제 욕심이 더 컸던 시기가 아니었나 합니다.
언어 상담만을 고집하는 것이 저와 학생 모두에게 썩 긍정적이지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이런저런 시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피규어, 다양한 주제의 카드, 점토, 동화책, 보드게임 등 여러 가지 매체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학생과의 대화가 조금 더 편하고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처음 보는 상담 선생님과 마주 보고 40분 동안 대화만 나누는 일이 어떤 학생에게는 어렵고 긴장되는 일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상담 선생님과 학생 그 중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보드게임이나 점토, 피규어 같은 매체가 끼어있으면 아이도 상담 장면을 한결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낍니다.
분위기가 편안해지면 학생은 좀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긴장하거나 정제되어 있는 모습에서 벗어나 좀 더 일상에서 보여줄 법한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은 점토로 만들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다른 학생은 피규어를 가지고 놀이하기를 좋아합니다. 학생마다 선호하는 매체가 다르다 보니, 상담실 안에 여러 매체를 구비해 놓습니다. 학생마다 개성이 참 다르다고 느끼는 게 매번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연필을 잡는 것조차 싫어하는 학생도 있고요.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완성품을 가져가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만들기를 마치 어떤 숙제라고 생각해서 귀찮아하는 학생도 있어요.
어떤 매체를 선호하는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관찰하면 학생이 가진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하물며 똑같이 보드게임을 좋아하더라도 주사위를 활용한 우연게임을 좋아하는지, 인지적인 전략게임을 좋아하는지, 승패가 나뉘지 않는 협력게임을 선호하는지를 통해서도 학생을 이해해 볼 수 있어요.
유창한 언어로 논리 정연하게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해 준다면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학생이 더 많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된다고들 하지요? 매끈한 언어 상담은 어려울지라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가 든든한 잇몸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은 아이들이 놀이할 때 쓸만한 피규어를 좀 더 찾아 상담실 수납장을 채워봐야겠습니다.
사진: Unsplash의Nachris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