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예 Oct 03. 2024

연기도 해야 하는 거였구나

상담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각기 다른 배경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다루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관계' 문제입니다. 특히 직접 자신의 고민을 들고 상담실에 찾아오는 학생 대부분이 관계 문제로 상담실 문을 두드립니다. 관계는 친구 관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가족과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 문제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지 고민하는 아이에게 "가서 잘 이야기해 봐"와 같은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잘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요?"라는 물음이 떠오르기 마련이지요. 그럼 이런 말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친절하게 다가가봐", "가서 사과를 먼저 해보는 건 어때?"


"잘 이야기해 봐"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긴 하나, 이 또한 모호합니다. 명확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알쏭달쏭한 말보다는 어떻게 말하는 게 잘 말하는 것인지, 어떤 말로 사과를 하면 좋은지 구체적인 언어로 알려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친구야, 아까 내가 소리 지른 거 미안해. 그때는 네가 내 발을 밟아서 아프고, 짜증이 나서 그랬어. 네가 일부러 밟은 건 아닌데 내가 너무 화를 냈던 것 같아. 난 너랑 다시 잘 지내고 싶어."와 같이 구체적인 대사로 예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모델링을 해주는 것이죠. 


학생이 말할 대사를 제가 처음부터 다 만들어 주지는 않아요. 학생이 관계 문제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 후에 학생이 느낀 것, 생각한 것, 원하는 것,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반영해서 구어체로 예를 들어줍니다. 구체적인 대사가 만들어졌다면, 이 말을 학생이 직접 입 밖으로 내보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예로 들어주는 말을 그대로 외우게 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상대방에게 전달할 내용이 모두 들어있다면 자기만의 색깔을 담아 자신의 어투로 말을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평소에 잘 해보지 않았던 말을 실전에서 곧바로 해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안 해봤던 말을 하려니 어색하고 민망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실전에서 써먹으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더라고요. 이런 이유로 상담실에서 학생과 역할 연습을 합니다. 마치 실전인 것처럼 연습을 하는 것인데요. 상담실에는 손에 끼워서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이 있는데, 그것을 활용해서 상황극을 해봅니다. 학생이 실제 마주하게 될 상황을 가정하고, 제가 상대 역할을 해줍니다. 그럼 그때 학생은 실전에서 해볼 수 있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저는 학생이 이야기해 준 이전의 상황을 듣고, 상대방이 할 만한 반응을 생각해서 역할을 해주는 편입니다. 나름 학생의 상대방이 어떤 캐릭터일지 상상해 보고 역할을 하는데, 어떤 학생은 "걔는 그렇게 말 안 해요" 하면서 제가 맡은 캐릭터의 말투를 수정해주기도 한답니다. 어느 정도 연습이 되면, 때때로 기출 변형을 해가면서 학생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은 반응을 하기도 하죠. 실전에서는 예상 문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양한 상황에서 학생이 대처하는 연습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학년 학생의 경우에는 인형을 가지고 연습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인형은 생략하고 하기도 합니다.


학생이 민망해하고 몰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저도 같이 민망해하면 역할 연습을 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래서 일단은 제가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 손에 인형을 끼우고 학생이 겪게 될 실전 상황을 연출합니다. 학생을 쳐다보기보다는 인형에 시선을 두고 역할 연습을 시작하면, 조금 덜 부담스러운지 금방 같이 몰입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어느 날은 점심시간에 3학년 여학생 한 명이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아침에 엄마랑 싸워서 속상하다면서,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파격적인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숙제를 아침에 할지, 저녁에 할지를 가지고 모녀간에 의견이 달라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그게 집에 들어가기 싫을 만큼의 큰 일인가 싶겠지만, 그 학생이 워낙 감수성이 풍부하고 여린 감성을 가지고 있다 보니 엄마와의 갈등이 많이 속상했던 모양이었어요. 


그날도 역할 연습을 시도했습니다. 학생이 엄마한테 가서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어떤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지 이야기 나누고 대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제 손에 끼워진 엄마 인형을 향해 상담이 끝나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할 말을 직접 해보도록 했어요. 워낙 감수성과 표현력이 좋은 학생이라 역할극에도 금방 몰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을까요, 학교 복도에서 마주친 그 학생이 "그때 선생님이랑 했던 거 엄마한테 얘기했더니, 엄마랑 다시 사이가 좋아졌어요!" 라며 후일담을 들려주더군요. 저와 연습을 했다고 해도 실전에서 직접 해보는 것은 오로지 학생의 몫인데, 실제로 해보고 엄마와의 갈등도 잘 풀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학생의 후기가 귀엽고 기특해서 웃음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수줍음이 많은 내향인이라 아무리 학생 앞이더라도 역할 연습을 위해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어색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주 편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역할 연습을 민망해하는 학생을 만나면 덩달아 위기가 찾아옵니다. 겉으로는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무진장 애쓰지만요. '그냥 학생 혼자 알아서 연습하라고 하고, 상담실에서는 굳이 하지 말까?' 하는 마음속의 유혹도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집에 가서 연습해 보고, 내일 친구한테 말해보자"라고 했을 때, 모든 학생이 연습을 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상담실에서 하지 않으면, 어디서도 연습해보지 않을 학생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저와 함께 있을 번이라도 연습하도록 하는 수밖에요. 


그렇게 연습하고 나서 실전에서 직접 상대방에게 말을 해보느냐, 하지 않느냐는 학생의 몫입니다. 그것은 학생의 결심이고 선택이니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관계 문제를 잘 풀어보려고 온 학생이 어떤 말을 전달하고 싶은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정리하고, 직접 말하는 연습을 할 기회를 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까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제 몫은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아직도 인형을 손에 끼우고 학생의 상대역을 하기 직전까지 '오늘은 그냥 넘어갈까?' 하는 마음속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제게 영 편한 일은 아니라서요. 그래도 엄마 역할을 하는 저를 보고는 "오와, 방금 진짜 엄마 같았어요. 소름!" 하는 학생의 말에 내심 뿌듯해하는 정도까지 발전한 걸 보면 저도 직업인으로서 꽤 성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기특하다 해보렵니다.





사진: UnsplashKonrad Roch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