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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예 Oct 17. 2024

학생과의 첫 만남에 꼭 해야 하는 일

상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꼭 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상담에 대한 구조화를 하는 일인데요. 상담실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만나게 될 것인지, 상담은 얼마간 이루어지는지 등 상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학생이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를 전달하고, 학생과 저 사이에 약속을 하는 과정입니다. 구조화를 할 때 이야기하게 되는 내용은 상담시간, 주기, 회기 수, 상담에 참여하기 어려운 날에는 미리 연락을 주어야 한다는 것, 비밀보장과 한계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매번 말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개 이런 식입니다.


"선생님은 앞으로 너와 상담을 하게 될 OOO 선생님이야. 우리는 매주 목요일 2시에 이곳 상담실에서 만나게 될 거야. 총 10번을 만나고 나면 상담이 끝날 텐데, 만약 우리에게 상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더 길게 만날 수도 있어. 우리가 매주 목요일 같은 시간에 만나기로 한 것은 너와 선생님 모두가 지켜야 하는 약속이야. 그렇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럴 때는 상담실 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 미리 알려주면 돼. 네가 직접 알리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부모님이나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도 괜찮아. 상담은 한 번 할 때, 40분 동안 이루어질 거야. 매번 같은 시간에 상담을 시작하고, 같은 시간에 마칠 거야."


"상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을 기대하고 왔니? 상담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어려움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야. 선생님이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줄줄이 나열하지도 않을 거고, 선생님은 단지 네가 가진 어려움을 네가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사람이란다. 네가 가진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너에게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하길 바라."


"상담실에서 네가 하는 이야기는 선생님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몇몇 상황에서는 비밀을 지켜줄 수가 없어. 예를 들어 네가 가출을 계획하고 있다거나,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거나, 자해를 했다거나, 학교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비밀을 지켜줄 수 없어. 왜냐하면 너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네가 누군가를 다치게 하려는 계획이 있다거나, 학교폭력 가해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비밀을 보장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 또는 다른 누군가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비밀을 지켜줄 수 없어. 그럴 때는 네게 미리 이야기를 하고 나서 부모님과 담임선생님께 알리게 될 거야."


되돌아보면 엉망진창이었던 것만 같은 발령 직후를 떠올려보면, 그때도 구조화를 한다고는 했지만 구체적이지 않았어요. 중요한 내용을 말하지 않거나 아예 구조화 과정을 빠트렸던 적도 있었죠. 구조화 과정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상담시간이 40분이라는 설명 없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아이는 시간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정해진 시간이 무색하게 아이의 말을 끊지 못하고 계속 듣느라 한 회기가 1시간이 넘어간 적도 있어요. 반대로 갑자기 10분 만에 친구랑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뜨려는 학생도 있었죠. 학생이 상담시간에 늦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고, 무단으로 상담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구조화 과정 중에 상담에 대한 기대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맞추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런 이야기 없이 상담이 시작되면 '상담만 하고 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고, '상담 선생님이 알아서 문제의 해결책을 줄 것'이라는 비합리적인 기대를 하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해결책을 줄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학생도 있었고, '벌써 세 번이나 상담실에 다녀왔는데 왜 변하는 게 없냐'라고 불평을 하는 학부모님을 만나기도 했죠. 


물론 상담 초기에 구조화를 한 번 한다고 해서 학생이 절대 지각하지 않고, 시간을 고려해서 이야기를 축약하며, 비합리적 기대를 한 번에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상담 초기 이후에도 학생이 계속 지각을 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있다면 다시 구조화를 합니다. 


'우리는 매주 목요일 2시에 이곳에서 만날 거야'라는 안내를 통해 저는 적어도 상담을 하는 기간만큼은 늘 같은 시간, 간은 장소에서 그 학생을 기다리는 사람이 됩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체로 어떤 학생들에게는 안정감을 선사해 줍니다. 구조화한 내용에 대해서 학생이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했다면 이는 암묵적인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학생이 가져온 어려움을 개선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손을 맞잡겠다는 동맹이 성사된 것이죠. 그러니 학생은 구조화를 하기 전보다 조금 더 적극적이고, 진지한 자세로 상담에 임하게 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구조화 과정이 엉망이었는데 상담이 별 탈없이 끝난 적도 있어요.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운이 좋았던 것일 뿐, 구조화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래성이 며칠 동안이나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날따라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가 치지 않고, 모래성을 망가뜨릴 누군가가 그곳을 지나지 않는 행운이 따랐던 것이지, 모래로 만든 성이 애초에 튼튼했기 때문은 아니니까요.



사진: UnsplashMasjid MA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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