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재미있는 일도 없고, 열정이 솟아나는 일도 없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인생권태기인가 싶은 때가 잔잔히 꽤 긴 시간 이어졌다.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그중에 절정에 해당했던 시기에는 '정말 이대로 그냥 다 끝나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소극적이지만 위험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이런저런 일로 회의감과 자괴감이 컸을 때여서 조금 위험한 생각까지 다다랐던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지금은 괜찮다. 그래도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 진심을 담아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아무튼 그늘졌던 그 시기에는 주변의 지지나 심리상담, 여행 등 내가 가진 자원들이 보내는 영양분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가족이나 친구의 위로, 내가 좋아하는 일상의 순간들에 감사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어쨌든 나에게 주어진 상황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서 끝이 없는 터널 속에 있는 기분에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뭘 그렇게까지 생각했나' 하며 조금 머쓱해진다.
그 시기에 만났던 상담선생님이 나에게 '당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당신이 잘 해내고 있다는 증거'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감사인사를 받았던 기억 같은 것을 떠올려보라는 것이었다.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없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때는 정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좀 괜찮아지고 나니 '내게 주어진 일을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는 증거'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당시에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기억 속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마음에 숨구멍이 좀 트이고 나니 그제야 '아, 그런 장면도 내 인생에 있었지' 하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그 시기를 잘 지나갔느냐고 묻는다면 한방에 드는 특효약이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가진 자원들이 보내는 영양분이 천천히 스며들면서 좋아졌다고 답해야겠다. 주변 사람들이 보내는 위로와 지지, 좋아하는 음식, 글쓰기, 심리상담, 자잘한 일상의 순간들이 보내는 좋은 에너지가 곧장 효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작은 모래알 같았던 좋은 에너지가 스멀스멀 모이더니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다라 거짓말처럼 탁 하고 축이 돌아갔다. 그렇게 괜찮아졌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작은 순간을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 제법 괜찮은 삶의 증거들을 잘 포착하고 모아두어야겠다는 다짐이다. 또 언젠가 터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 경험해 봤으니 그때는 '끝이 없어 보이는 이 터널에도 끝이 있다고, 터널을 나가고 나면 터널에 들어가게 된 이유조차 희미해질 거라고, 거짓말처럼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잘 모아둔 '제법 괜찮은 삶'의 증거들이 터널의 끝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지 않을까.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작은 순간들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퇴근 후에 느끼는 아늑한 집의 온기, 일을 마친 후의 뿌듯함,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들, 주고받는 시시한 농담, 유치한 애정표현, 따뜻한 친절, 눈 쌓인 숲을 보는 일, 늦은 밤의 야식, 휴일 아침의 늦잠, 하루종일 게으름 피우기, TV 속 맛집을 찾아 3시간 드라이브하기, 나만 볼 수 있는 일기장. 별나지 않은 일상이지만 벅찬 마음으로 지금 내게 주어진 이 고요하고 시시한 행복을 사랑하련다.
사진: Unsplash의Eugene Chystiak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