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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May 05. 2024

외국에서 피어난 불꽃

사람과 사랑, [People & Love]

외국에서 피어난 불꽃

‘플링(fling)’, 아무 생각 않고 실컷 즐기는 짧고 얕은 관계.

갑작스레 폭설 주의보가 울리던 추운 하루였다. 함박눈이 땅 위로 펑펑 던져지는 그날엔 예상치 못한 예정된 헤어짐이 찾아왔다.


지난가을, 그와 나는 한국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해 겨울, 그와 프랑스에서 반가운 재회를 하였다. 순식간에 불꽃이 튀어 올랐고, 추운 계절 속에서 그 불꽃으로 온기를 나누었다. 보이기엔 쿵짝이 잘 맞고, 뜨겁고 열정적인 듯했고(그러기도 했지만), 좋은 인연이라고 믿었다. 실은 겉불꽃만 요란하게 활활 튀어 올랐던 것인데. 정작 가장 밝게 빛나야 하는 속불꽃은 굉장히 미적지근하며 쉽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속불꽃마저 '쉭-'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누군가 하늘에서 눈으로 만들어진 신문지를 잘게 잘게 덩어리째 찢는 것처럼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앞으로 펼쳐질 일들은 전혀 모른 채로, 오래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러 집 밖을 나왔다(이런 날, 한 치 앞도 못 보는 사실이 야속하다). 눈이 내릴 거라는 날씨 예보를 확인했지만 평소처럼 조금 내리다 말 거라며 마음대로 생각하고 우산도 챙기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안시 아빠께서 억지로라도 손에 들고 보냈던 우산은 길 위에서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릴 수 있던 상황에서 비켜나가게 해 주었다. 하지만 마음이 차가워지다 못해 얼어버리는 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눈 내리는 길 위에서, 상대와 피웠던 불꽃이 순식간에 사라져 희미해지는 불씨를 뿌연 시야로 바라보았다. 우산 범위를 침범하며 마구 때려오는 눈이 만들어낸 물과 그와의 끝난 인연으로 인한 분노와 서러움, 실망 등 복합적인 감정으로 내리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정확히 헤어짐이 낳는 슬픔의 과정을 겪는 중이었다. 참아도, 소리쳐도, 울어도, 먹고 마셔도, 하루가 끝나지 않는 긴 밤은 오랜만이었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함께 발맞추어 잔잔한 불씨를 유지한다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국적이 다른 관계라면 더더욱. 국제 ‘플링(fling)’이 쉬울 거라고 여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경험이 없으므로 비롯되는 무지함 뒤에 가려진 현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와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과 따라오는 감정에 매번 허덕였다. 대부분의 관계성에서 얻을 수 있듯이 우리에게도 좋았던 일, 안 좋았던 일 별의별 일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다행인 건 헤어짐 끝에 몇 가지 배움이 남겨져있다는 점이다. 


먼저, ‘생각을 삼키면 안 된다는 점’이다. 서로에게 찾아온 상황이 처음이라서 배려하는 척(각자 자신의 고집이 세기 때문에 진심 어린 배려보단 상대를 위하는 척이 강했다.), 가끔은 눈치를 보며 기분을 공유하고, 때론 생각을 삼키었다. 특히, 생각이 많은 쪽이 생각을 삼키다 보면 속앓이를 겪는다. 뒤에서든 속으로든 상대를 불평하기까지 이어진다. 그러다 힘겹게 쌓아 올린 감정이 터질법한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면 눌러왔던 불평을 하나씩 꺼내어 털어둔다. 그 과정에서 상대는 갑작스러운 불평에 혼란을 느낀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는 모습이 드물었다. 결국, 이 굴레가 반복되었다. ‘한쪽에서 누적되는 생각 보따리, 작은 다툼, 터진 감정, 목소리 커지는 대화’


두 번째, ‘관계를 애매하게 정의하지 말자는 점’이다. 웬만하면 말이다. 좋은 감정은 있지만, 국제 연애에 자신이 없다는 변명을 대며 공식적인 연인관계를 맺지 않았다. 딱 ‘플링’ 정도의 관계였다. 어느 날, 서로 말다툼이 있었다. 그때, 상대는 이걸 짚고 넘어졌다. 진지한 관계가 아님에도, 왜 그런 일들로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방식으로 대화를 풀어나가려 했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연인 관계로 정립하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친구로서 각자의 감정을 나누고 존중하고 배려해 줘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나중에 깨우쳤다.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고, 함께하고 싶었다면 이리 관계를 애매하게 두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 우린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성숙하지 못했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며 지금은 스스로 위안한다. 또, 앞으로 어떤 관계든 애매하게 세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졌다.


사실 위 두 가지는 국제 연애에서 비롯되는 불편함만은 아니다. 같은 국적인 한국인과의 사이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마지막 깨우침은 외국인과 피운 불꽃이라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언어 및 문화차이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뭣도 모르고 전형적인 한국 사회와 정서에 길든 한국 남자는 싫다고 무조건 외국인을 만날 거라며 떠들어댔다. 그러나 모국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불쑥 찾아오는 외로움과 갈등 상황에 마주해 본 후, 다시는 그 말을 쉽게 꺼내지 않는다(그렇다고 하여, 사회매뉴얼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좋은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양쪽 중 한쪽의 친구들이 다 모이는 모임에 참석해야 할 때이다. 상대방들은 모국어가 편하다는 이유로 어느새 모국어로만 떠들기 시작하고, 그 사이에 껴있는 이방인은 정말 말 그대로 이방인이 되어 외로움과 서러움을 느낀다. '현타', 현실 자각 타임이다. '난 지금 어디에, 왜 이곳에, 어쩌다, 무엇을 하려고 이 사람과 이 대우를 받으며?' 등 가지각색의 소리가 뇌를 스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필자의 경험은 그러했다. ‘문화’와 '성격'차이는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 참 애매모호하다. 그탓에 서로의 입으로 흘러나오는 단어, 각 고유한 언어가 주는 뉘앙스, 태도 등에서 '이것이 문화 차이일까, 그저 그 사람의 성격인 걸까.'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결국 심리적인 고갈이 많아져서 나중엔 고민을 포기해 버리며, 모든 차이가 자질구레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과정에서 인내심과 갈등을 해결하려 하는 노력을 더 기울였어야 했다. 그렇지만 우린 한계에 다 달랐고, 결국 포기했다. 아무쪼록 국제연애를 한다면, 사람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문화 이해까지 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크기가 심히 필요하다. 만약, 언어차이로 상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자세도.


앞으로, 상대가 외국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아끼고 싶은, 오래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면 위 세 가지를 곱씹으며 단단한 관계를 맺고 싶다. 이래서 많이 만나봐야 한다는 말이 나온 걸까. 만나보지 않으면 모르니깐.


France, Annecy 20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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