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랑, [People & Love]
생각보따리를 챙겨주는 사람
만날 때마다 보따리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 보따리의 형태는 다양하다.
할머니 댁에 갈 때면 두 손 무겁게 들고 나오는 반찬 보따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얻는 웃음 혹은 울음 보따리. 내면의 성장을 거치게 만들어주는 ‘생각 보따리’도 있다.
N 언니와 나는 외국에서 처음 만났고, 한국에서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잠시 반가움을 나누다 보면, 둘 중 한 명에게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하는 시간이 순식간에 찾아온다. 원래 그랬듯, 물리적 거리가 한 번 더 멀어진다. 하지만 금세 인연이 닿거나 서로의 주변 사람과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기도 한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둘 사이에 맺어진 연결고리 덕분에 마음은 서로 가깝다. 어디에서 만나든,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든 어색한 공기를 찾기 어렵다. 그저 반갑게 재회한다. 마주하면 누구 먼저 할 거 없이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고 듣고 같이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등 과거, 현실, 미래 구분 없이 진솔한 대화를 많이 나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마음이 가볍지 않다. 축 처지는 무거움도 아니다. 딱 적당한 무게의 생각 보따리가 주어진다. 찾아온 생각은 삼키지 않는다. 그것이 마음과 머릿속을 마구 휘저을지라도, 보따리를 풀어보려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 포장을 뜯듯이 포장을 풀어보면, 이미 짐작했던 생각 보따리가 주어지거나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고민이 찾아온다.
한 번은 N 언니와 ‘사랑’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다. 하루라고 하기엔 짧고, 꽤 긴 기간 동안 틈틈이 이 주제가 대화에 녹아들었다. 당시 내게 가장 큰 의문이자 고민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두려움, 신뢰'에 대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사랑’이었다. 스스로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때로는 냉정한 모습(특히 이성을 대할 때 그렇다)과 사랑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자리 잡힌 마음이 마구마구 드러나던 때였다. 다정한 것 같지만 차갑고, 사랑을 많이 받아온 것 같지만 외로움과 상처가 많고, 영원함과 헤어짐에 대해 두려워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던 중이었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했다가 상처받기 싫어서 좋아하는 마음을 스스로조차도 무시하고, 감정을 눌러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심하게 하는 때였다. 희한하게도, 여행을 떠날수록 이러한 약점 같은 모습들이 도드라졌다. 그때마다 나의 시선은 이 약점을 감추고, 부정하고, 억누르고 싶은 모습과 스스로의 상처를 바라봐주며 솔직해지자는 모습 사이에서 엉거주춤했다. 결국 '나'가 아닌, '다른 것'에 애써 시선이 집중됐다. 스스로를 외면할수록, 상처는 아물지 않고 더 깊어지고 있었다. 혼자만의 125일 여행 전까지는. 지금까지 잘 눌러왔던 모습이 왜 갑자기 불쑥불쑥 튀어나왔을까 반추해 봤다. 혼자 여행을 길게 하다 보니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 보고 싶지 않은 모습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많지 않았을까.
이번 여정으로 닿은 사람들을 통해, 더 이상 불신할 수 없을만한 사랑의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잦았다. 사랑을 보고 받고 느끼고 주면서 황홀한 동시에 궁금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리 소중한 '사람'과 '사랑'이 주어졌을지. 그때, N 언니는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기에 사랑을 주는 사람이 보이는 거고,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언니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 깊이 새겨져, 사랑에 대한 신뢰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말이 맞다면, 그렇게 믿는다면 난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도 나는 쉬지 않고 일렁이는 물살처럼 어떻게 더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어떻게 사랑을 믿고 건네줄 수 있는 사랑 가득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등 물음표가 머릿속을 휘젓는다. 훗날엔 누군가에게 생각 보따리를 나눠줄 수 있는 단단하고 든든한 필자로 빛나길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