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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May 19. 2024

사라진 빛, 색, 소리, 사람

삶과 문화 (Life & Culture)

사라진 빛, 색, 소리, 사람
01. 색 없는 길 위에서

사람들에게 색이 안 보인다.


어두컴컴한 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재빨리 공항버스에 몸을 싣고 집으로 달려갔다. 가슴 곳곳에는 자유로운 여행자의 삶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는 허함과 절망, 그리움 등이 파도치고 있었다. 어쩌면 요동치는 파도와 맞닥뜨리지 않으려 괜히 이곳저곳 눈길을 돌리느라 몸도 빠르게 움직였을 테다. 마음속으로 거칠게 밀려들어오는 파도를 잠시 떠밀며 오랜만에 내 방에서 잠을 청해 무거웠던 두 눈을 붙였다. 낯선 공기 속 새로운 방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닌, 기존에 내 방, 익숙한 공간에서 일어난 첫날은 낯설었다. 낯섦을 하루빨리 떨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밖을 나섰다. 동네를 떠난 몇 개월 동안, 마치 향수병을 앓았던 것처럼, 보고 싶었던 감정을 애써 만들며 천천히, 느리게 동네를 둘러보았다. ‘여긴 여전하네.’라고 생각이 스칠 찰나에, 흠칫 눈앞의 풍경이 생각을 삼키게 했다. 희한하게도 그날은 몇 년 동안 지내오던 익숙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거리를 다녀보았지만, 이토록 검정, 회색 등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거리는 처음이었다. 처음이 아닌 거리에서 처음처럼 느껴지는 이 분위기,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저 몇 달간 세계를 방랑했을 뿐인데. 사이에 생긴 거리감은 쉽게 깨고 다가가기 어려웠다.


감사하게도, 세계를 누비며 나의 시야는 알록달록해졌다. 그래서인지, 평소 돌던 동네 한 바퀴가 침착하다 못해 우울해질 정도로 삭막한 산책 코스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채색을 배경으로 가끔 등장하는 밝은 색에 눈이 동그래지며 반가움을 표할 정도였다. 대게 그 역할은 신호등과 노란 어린이 구역 표지판이었지만. 착잡했다. 몇십 년을 반짝이지 않는 땅 위에서 살아왔음을 어른이 되어 깨달았다. 색이 없는 길 위에서,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날이었다.


02. 사라진 빛

지하철 안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모습이 'Ctrl c+Ctrl v' 한 것처럼 비슷하다. 우리는 서로 핸드폰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필자도 그렇다. 사람의 목이 약해서 기울어지는 건지, 스마트폰 화면의 힘이 목을 꺾을 정도로 강한 건지. 사람들은 대개 종이에 무언가를 쓰거나 활자로 된 책을 읽는 대신 두 귀를 꽉 막고, 두 눈을 멍하니 화면에 두고 있다. 우리의 손가락은 웃긴 영상을 애써 찾아보는 듯 바삐 움직이지만, 아무도 웃음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을 떠나 그간 여행을 하면서 비행기, 버스, 기차, 배 등 교통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이리저리 몸을 실었다. 여행자 신분이어야만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순간이 '이동 시간'이라고 여기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늘 도로 위에 만사태평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여행자는 길 위에서 도시 간, 나라 간 이동을 위해 다양한 도로 상황(시위 구간을 피해 산길을 가야 하는 경우도 보았다.)을 만나고, 국경을 넘고,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한다. 2023년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느라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수두룩했다. 하염없이 하늘, 도로, 철도, 바다를 다니며 무엇을 했었지? 반추해 보면 ‘멍때리기’, ‘잠자기’, ‘책 읽기’, ‘옆 사람과 대화하거나 다른 여행자의 영어 대화를 들으며 영어 공부하기(라고, 그럴싸한 이유를 댄다.)’가 전부였다.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며 현재를 느꼈다. 시간과 위치를 확인하거나 메모장을 여는 일이 아니라면 자연스레 핸드폰을 꺼내 들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터졌다, 안 터졌다 오락가락하는 인터넷 연결 상태와 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기까지 와서 말이다. 자연스레 핸드폰을 포기하고 나니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지금'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늘 위라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변화무쌍한 구름과 빛으로 덮인 하늘에 집중한다. 도로 위라면, 대게 맨 앞자리에 앉아 넓게 보이는 창밖에 빠져든다. 철도 위를 힘겹게 덜컹거리며 지나갈 때는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기차 소리에 그저 눈을 감는다. 바다 위를 둥둥 떠가는 배를 탈 때면, 윤슬로 빛나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바람을 느낀다.


그렇다. 나는 길 위에서 천천히, 오랫동안 현재에 집중하는 나의 모습과 자주 만났다. 그럴 때마다 생각 주머니에 어지럽게 자리를 차지하던 잡념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새로운 영감이 똑똑하며 찾아왔다.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메모장은 여행이 끝날 무렵, 계속해서 스크롤을 위로 넘겨야 할 정도로 알록달록한 기쁨들이 한가득 묻어져 있었다. 길 위에서 만들어진 메모장 덕분에 지금의 글을 쓰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대중교통 안에서 빛을 바라보기도 어렵다. 하루는 해가 지기 전 노란 따뜻한 빛이 내려오는 저녁 시간에 기차를 타고, 군복무 중인 동생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넓은 유리창 밖으로 빛을 더 빛내주는 봄의 개나리에 시선을 두었다. 노랗고 따스한 햇살이 더해져 짙어진 개나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하였다. 노란 감성에 젖으려 할 즘, 차갑게 내려오는 햇빛 가리개. 뒷좌석에 있던 사람에게 이 빛은 달갑지 않았나 보다. 순식간에 내려오던 햇빛 가리개와 빛을 외면한 뒷자리의 어떤 이의 마음은 빛을 마중 나왔던 나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였다.


요즘은 정말이지, 길 위에서 사라진 빛, 색, 소리,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


Hungary, Budapest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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