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살 [EAT & FAT]
식사의 의미
‘끼니’, 밥을 먹는 횟수를 세는 단위.
나라마다 안부를 전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 흥미롭다. 외국에서는 흔히 "How are you?"라고 서로의 기분을 물어본다면 한국에서는 "밥은 먹었어?"로 대화를 시작한다. 서로 배가 든든한지 물어봐 주는 이 말은 따스하다. 안타깝게도, 따스한 말과는 달리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점차 차가워지고 있다.
오랜만에 발길을 한 종로 한복판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잠시 정차한 곳은 통유리창으로 이루어진 맥도날드 앞이었다.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모습은 2층에서 한 명씩 따로 앉아 각자의 점심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햄버거를 먹는 사람, 지나가다가 잠시 들려 요기를 채우려는 사람, 그리고 외로이 보이는 한 할아버님까지. 정차했던 버스는 초록 불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나의 시선과 생각은 여전히 맥도날드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 우리나라에서 밥을 먹는다는 건 끼니를 때우는 의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까지 일반적으로 세 번의 밥을 잘 챙겨 먹었는지를 따져보며 하루를 규칙적으로 잘 살았는가를 판단하는 일종의 척도 같다. 밥과 식사의 질과는 관계없이. 무엇이든 빠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한국답게 식사에서도 예외 없이 신속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우리는 누가 다그치지 않아도 급한 식사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주문, 조리, 끼니를 때우는 행위, 정리에 대부분의 식사가 속전속결이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을 먹으며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고, 음식을 나눠 먹고, 함께 맛보며 길게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대신 끼니를 간단히 때울 수 있는 밥을 먹으며 핸드폰 화면과 눈을 마주치고, 음식을 혼자 먹고, 맛을 음미하기 전에 삼켜버리고, 후다닥 자리를 정리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우리에게 한자리에서 밥을 두 시간 가까이 될 정도로 느릿느릿 먹는 날이 365일 중 며칠이 있을까. 한 식당에서 자리 잡고 한 시간도 안 되어 나가야 하는 짧은 점심시간이 일상인 한국 직장인들에겐 더더욱 그 여유로운 식사 시간을 찾기란 어렵진 않을까.
비슷한 일화로 작년 크리스마스쯤, 벨기에 ‘브뤼헤’에서 점심으로 홍합탕을 혼자 먹으며 두 테이블을 구경하던 날이 있었다. 테이블을 잡고 앉은 후, 옆 테이블의 사람들을 흘긋흘긋 봤을 때 테이블은 정리 후 술잔만 올려진 것으로 보아 그들의 식사는 끝나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저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 나의 한 냄비 가득한 홍합이 나왔을 즘 그녀들은 주문을 시작했고, 홍합이 반으로 줄어들 때쯤, 이들의 음식이 나왔다. 이어서, 제2차 대화의 장이 시작되었다. 앞 테이블에 앉은 한 가족의 대화 장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로 조용히 식사 예절을 지키며 조곤조곤 잔잔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의 홍합탕에 바닥이 보일 즈음에도 두 테이블의 식사가 이어졌고, 결국 제일 늦게 온 나는 홀로 먼저 일어서야 했다. 이들에게 식사의 의미는 정말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날이었다. 이들에게 식사란, 식전주를 마시며 분위기를 달구고, 본 메뉴를 푸짐하게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달달한 디저트와 커피를 마셔야 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외국에서 주고받는 안부의 말엔 '밥'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나는 그들의 따뜻하고 풍성한 식사 문화를 좋아한다. '밥 먹었어?'라는 말이 단순히 밥을 먹은 횟수를 세는 행위에서 벗어나, 나의 오감을, 타인과 함께하고 있다면 타인의 오감을 서로 일깨워주며 느긋한 식사 시간을 보냈는지의 의미가 담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