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환경 'M.E (Me & Environment)'
사람이 아닌 환경이 만든 우리의 여행지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각 나라, 도시, 동네마다 다른 고유한 분위기를 즐기며 나와 맞는 곳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지금껏, 느낀 그곳만의 분위기는 제일 먼저 사람이 만들어 간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말로만 들어도 흥겨운 태국의 방콕이나 사방에서 EDM이 들려올 듯한 이비자 같은 곳은 흥겨운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고, 프랑스인들이 은퇴하고 유유자적 보내고 싶어 하는 프랑스 'Annecy(안시)' 같은 마을은 높은 연령대가 모여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다고 여겼다. 듣기만 해도 강렬한 태양과 시원한 바다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집트의 다합, 포르투갈, 스페인 남부는 해수욕과 레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시원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완성시키는 것 또한. 이처럼 한 곳에 어떤 성향의 사람이 모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여행지 성격과 분위기 등이 정해지는 거라고 생각해 왔다.
어느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대서양이 광활히 뻗어있는 포르투갈 남부 'Lagos(라고스)'의 길거리를 거닐다 문득 다른 여행지가 떠올랐다. '어, 여기 이집트 다합의 느낌이 물씬 나는걸.' 큰 물통을 하나 겨드랑이에 껴놓고, 숙소 밖을 나와 익숙한 하루를 시작하던 라고스의 첫날이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보이는 하얀색으로 덮인 집 담과 주황 지붕, 하얀 담벼락 위를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무성한 초록 잎과 꽃, 건조한 길거리의 틈 사이로 곳곳에 비치는 그림자와 바다를 보며 해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라고스가 처음처럼 느껴지지 않던 이유는 다합에서 맡았던 익숙한 향을 다시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라고스에서 이집트 다합을 느꼈다.
이날을 계기로, '한 나라, 지역, 마을의 분위기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먼저 정해진 숙명일 수 있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라는지에 대해 선택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향하는 여행지들도 그곳의 지형, 지리 따위에 따라 만들어져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가 푸르른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면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군데로 모여 설렁거리는 여유로움, 해방감, 흥겨움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가꾸어간다. 사방이 돌산이나 초록 잎이 무성한 산으로 둘러싸였다면 차분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비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숨을 고요히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혹은 설산이라면 눈과 놀이를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스키나, 스노우보드, 썰매를 탈 수 있는 환경을 만약, 바다도 산도 눈도 없는 무미건조한 건물만 빼곡히 놓일 수 있는 지리라면 몸과 마음의 여유 없이 삶을 연명하느라 지친 이들이 모여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지 않을까.
숙명처럼 주어진 환경을 간직하던 나라에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따라 찾아옴으로써, 환경이 만들어 둔 여행지에 여행자들이 가미를 더한다. 기존의 분위기를 더욱 잘 살리거나 때로는 더 죽임으로써 그곳의 고유한 분위기를 띄우거나 변질시킨다. 여행자들에겐 자신의 취향을 따라 여행지를 선택할 수 있는 폭넓은 자유가 있다.
그동안 산, 바다, 건조한 지역 등을 다녀보니 깨달았다.
나는 설렁거릴 수 있는 작은 해변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산이 있는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언제든 바닷속에서 헤엄칠 수 있고,
또 언제든 산을 오르고 내리며 숨을 쉴 수 있는 곳을 여행하고, 오래도록 보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