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여행자
부다페스트 동네 수영장
헝가리를 여행하면서 계속해서 든 생각은 '이 나라 정말 편안하다.'였다. 보통 여행을 할 때면 하루 종일 여행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가끔은 다음 날 피곤해하기도 하고, 그 피곤이 누적돼서 한국에 돌아오면 에너지 충전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잠깐 들린 부다페스트에서는 불필요한 감정 대신에,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일주일이라는 여유로운 시간도 이 감정에 한몫했을 테이다. 그렇지만 부다페스트는 여행 초반부터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감정'을 주었고, 자연스레 '바쁜 여행자' 대신에 '여유로운 여행자'로서 헝가리를 즐기고 있었다.
하루는 세체니 온천에서 즐겼던 수영이 아른거려 동네 수영장을 찾아갔다. 아는 언니의 추천 덕분에 부다페스트 주민들이 다니는 평범한 로컬 수영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아무런 정보 없이 구글맵에 장소만 입력하고 발길을 향했다. 로비에 도착을 하긴 했는데 수영장도, 로비를 지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몇 분 기다려봤으나 변화 없이 계속해서 시간만 흘러, 요리조리 살펴보며 사람을 찾았다. 그때, 한 할머님께서 나오셨고 수영하러 왔냐고 말을 건네주셨다. 내가 서있던 로비와는 또 다른 로비가 구석에 있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장권을 구매했다. 관광지가 아니라 동네 수영장이라서 그런 걸까, 가뜩이나 저렴한 이용료에 학생 할인까지 받아서 더욱 저렴한 가격을 지불하고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한화로 대략 4천 원 정도 냈던 걸로 기억한다. 수영장 이용료, 라커 대여 등 모든 사용료가 포함된 가격이다. 심지어 비회원으로 왔는데도 말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저렴한 물가인 듯하다.
헝가리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흐를수록 깨닫는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곳'이라는 점이다. 최근에 도전했던 스케이트이며, 일상의 일부인 수영이며 이용료가 저렴하다. 취미 생활을 할 때 돈에 연연하지 않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은 삶에 있어서 참 중요한 요소이지 않을까! 그렇게 난 또, 헝가리의 매력에 빠지며 세체니에 이어 나 홀로 수영을 즐겼다.
마침, 내가 갔던 오후 시간대에는 '야외 50m 풀 수영장'만 이용이 가능했던 때였다. 한국과 달리 헝가리에는 야외에 수영장을 보편적으로 많이 만들어 놓은 듯하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한겨울이었지만 샤워하고 수영장 물속으로 빠지기 전까지와 잠시 쉬는 시간과 수영하고 뛰쳐나오는 그 순간만 꾹 참으면, 겨울 야외 수영도 나름 묘한 매력이 있다. 개인적으로 야외 시설이라는 이점보다도, 각 레인의 공간이 충분하다는 게 좋았다. 한국에서 다니던 수영장에서는 각 레인이 좁고, 시설도 좁고, 사람은 많아서 한 레인에 2~3명씩은 기본으로 함께 한다. 자연스럽게 평영, 접영, 배영 등 팔 동작과 발동작이 많은 동작은 주저하게 되고 거의 못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수영장에서는 초반에 한 할아버지와 함께 했는데 할아버지와 서로 평영을 하면서 왔다 갔다 해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개구리 발동작을 하는데도 안 부딪힐 정도의 레인 간격이었다.
수심이 너무 깊은 곳은 처음이라, 할아버지께 수심이 대략 어느 정도 되는지 여쭤보고 들어섰다. 대략 2m 정도였고, 알고 보니 이 야외 수영장은 선수들 대회용으로도 많이 쓰인다고 한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수영인들이 제법 많이 오는 듯했다. 열심히 훈련 중인 사람들 속에서 혼자 여유롭게 물놀이를 즐기고 나와 또다시 헝가리안 라따뚜이를 먹으러 이동했다. 세체니에서 놀고 라따뚜이를 먹은 것처럼 그대로, 이번엔 제로 콜라를 곁들여서.
아침 장소, fekete
헝가리 여행 첫날 아침 먹으러 들렸던 곳이다. 첫날 분위기이며, 가격이며, 맛이며 모든 요소들이 나의 취향과 맞아 아침이 되면 fekete에 들려 좋아하는 그래놀라와 커피, 혹은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을 잘 보고 다음에 똑같이 시켜 먹어보기도 했다. 여느 때처럼, fekete에 가서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이었나?' 유독 여행객들이 많이 보였다.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연휴로 외국인들이 (나도 포함이지만) 부다페스트로 점점 몰리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튼 끊임없이 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여행 온 외국인들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 메뉴 좀 추천해 줄 수 있어?", "너는 뭐 시켰어?", "여기 뭐가 맛있어?"
나는 바로, 평소에 즐겨먹던 그래놀라랑 크로와상을 추천해 주었다. 덧붙여, "원래 그래놀라를 먹는데 오늘은 헝가리 사람이 아침으로 먹던 메뉴를 시켜봤어, 근데 아직 안 먹어봐서 맛은 잘 모르겠어." 나의 추천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처음 와서 잘 모르겠다고 웃으며 훈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침 이번에 처음으로 시켜 본 이름이 어려웠던 음식이 나왔다. 천천히 빵을 뜯어 소스를 찍어서 먹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스스로 웃기면서도 나름 기분이 좋았던 방금 상황을 떠올려 봤다. 생각해 보니, '나도 여행자인데..?'
그들 눈에는 여기서 지내고 있던 유학생이나, 오래 살고 있던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하기야, 이곳은 주로 현지인들이 자주 아침을 시작하기 위해 모이는 카페였고 편안한 옷차림과 퉁퉁 부은 얼굴로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내 모습을 보았으니 말이다. 나를 여기 살고 있던, 이곳을 잘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질문을 해줘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이 음식을 볼 때마다, 음식의 맛보다는 또 다른 여행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이 순간이 더욱 새록새록 기억난다.
(이 음식은 개인적으로 많이 짰다. 그래놀라와 커피 조합이 제일 좋았다.)
여행객에게 부다페스트 시내 구경시켜주기
하루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 로컬 시장에서 든든하게 쌀국수 한 그릇 뚝딱하고, 커피를 마신 후, 홀로 적적한 공기와 함께 밤 산책을 실컷 즐겼다. 이제 숙소에서 씻고 누우면 딱이겠다 하고 숙소에 들어가 씻고, 침대에 올라가려는 순간 나딸리아를 만났다. 잠깐 인사를 주고받다가 또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것이 호스텔의 매력이랄까, 저번에도 이 호스텔에서 러시아 친구를 만나서 2시간 넘게 수다를 나누다가 새벽을 거의 샜던 적이 있다. 다시 찾아온 이곳에서 역시나, 공교롭게도 새로운 러시아 친구와 대화를 하게 되었고 오늘 부다페스트에 처음 왔는데 내일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부다페스트의 밤이었던 거다. "너 지금 뭐 할 거야? 시간 되면 나랑 같이 구경할래?" 잠깐 주저했지만, 거절하기에는 미안해서 "그래! 내가 구경시켜줄게!"라고 말하며 씻자마자 다시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다시 밤의 부다페스트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나딸리아에게 이곳저곳 소개해주고 있었다. 나딸리아는 지도 하나 켜지 않고 정말 나를 신뢰하며 구경을 하고 있었고, 또 좋아하는 모습에 혼자 기뻐서 여기저기 여행객이 좋아할 곳들을 데려가서 사진도 남겨주고, 대화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에 술도 같이 마셔주고 싶었지만 점점 동공이 풀려가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와서 지친 다리 때문에, 메트로 타는 방법을 마지막으로 알려주고 헤어졌다.
체코에 있던 친구였는데, 연휴를 맞이해 러시아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부다페스트에 들렸고, 평소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던 나딸리아가 인상적이었다. 타국에서 일을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헝가리에 와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이번에도 나딸리아랑 놀고 헤어지는 길에, '생각해보니, 나도 여행자인데 다른 여행자한테 부다페스트 여행을 시켜줬네..?' 어느새 보니, 나는 여유로운 여행자, 마치 부다페스트를 오래 알고 있는 듯한 편안한 사람처럼 다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나와 같이 느꼈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