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옮겨 심는 아침
내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상상 그리기를 참 많이 했다. 주로 과학상상 그리기였는데 이를테면 해저도시를 그린다거나 사람이 날아다닐 수 있게 하는 도구가 생긴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때 내가 그렸던 과학상상 그리기 내용 중에는 길이 움직여서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되는 장면이 있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무빙워크처럼 말이다. 해저 도시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은 바 없지만 내 손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혹시 또 모른다. 물론 바다환경을 생각해서 바다 속에 도시를 짓는다는 것은 지금은 좀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과학적인 상상력이 그다지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어서 그랬는지, 전화기를 들고 다니며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은 내가 학교를 채 다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화기로 또 무엇을 할 수 있게 될지 여전히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 아침, 이런 나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생겼다. 그것은 이 작은 단말기 하나로 소리나 사진과 영상을 전해줄 수 있게 되었듯이 향기를 전해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제 비가 오락가락, 쏟아 붓기도 하고 잠시 그치기도 하며 하루 종일 물기 가득한 날을 보냈다. 말라가고 있던 작물과 나무들마다 흥건히 물이 올라 오늘 아침에는 하루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쯤은 더 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흙도 촉촉하다. 밭에 들어가 걸음을 걸을 때마다 폭신하게 들어갔다가 탄력 있게 다시 솟아오른다. 정말 반가운 비였다.
오늘 아침에는 벼르고 있던 화초 작업을 했다. 비가 오기만을 기다려 흙이 충분히 젖고 나면 옮겨 심으리라 했던 해바라기와 코스모스가 있다. 해바라기는 이른 봄에 밭 한쪽에 씨를 콕콕 꽂아 두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인 녀석들도 있고 열심히 자라서 벌써 무릎만큼 올라온 녀석들도 있다. 이 아이들을 밭에서 뽑아서 집으로 올라오는 길 옆에 해가 잘 드는 언덕 옆에 심어주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땅이 말라 있을 때는 힘을 주어 뽑아도 뽑히지 않을 것 같던 아이들이었는데, 오늘은 가서 조금 건드려주기만 했는데도 쑤욱 뽑아져 올라왔다. 뿌리도 상하지 않고 힘도 들이지 않고 뽑을 수 있었다.
뽑아온 해바라기를 대야에 담아 키 순으로 정렬해 놓고 하나씩 옮겨심기 시작하는데 호미로 흙을 한번 뒤집을 때마다 흙내음이 진하게 올라왔다. 마치 향수를 한 번씩 칙칙 뿌릴 때마다 향기가 진해지듯이 호미로 흙을 한 번씩 푹푹 뒤집을 때마다 흙향기가 코로 진하게 올라왔다. 해바라기들을 간격에 맞게 정렬해 놓고 엉덩이 의자를 다리에 끼고 앉아서 하나씩 세워 심었다. 흠뻑 젖어 있는 땅이라 무엇을 해도 손쉽다. 잘 파지기도 하고 잘 심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날 화초를 옮겨 심어야 이사 간 땅에서도 꽃이 뿌리를 잘 내릴 수가 있다.
해바라기를 줄지어 심어 놓고 뒤를 돌아보니 반대편 길가에 코스모스가 어지러이 자라 있다. 작년에 몇 개의 모종을 심어 놓았던 것이 씨를 퍼트려 올해는 길가에 수북이 자라 있는 것이다. 자기들 마음 내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자라다 보니 군데군데 비어 있는 곳도 있고 자라지 말아야 할 곳에 뿌리를 내린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흙냄새에 취한 김에 코스모스도 정리를 좀 해 주기로 한다.
아주 작은 녀석들, 한 뼘이나 겨우 자란 아이들인데도 줄기와 잎을 만지면 분명하게 코스모스 향기가 난다. 엉뚱한 곳에 뿌리를 내린 어린 코스모스를 쑥쑥 손으로 뽑아내니 약간 알싸하고 아득해지는 그 코스모스 냄새가 손에 가득 묻어 내 손엔 벌써 꽃이 한 가득 피어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서 뽑은 코스모스를 줄 맞추어 길 가에 심어놓고 물을 주는데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분명 퍼런 잎사귀만 있는 어린 코스모스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서 이 길은 여리고 청초한 색색의 꽃이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길이었다.
어디에 호미를 꽂아도 흙내음이 훅 올라오는 비 개인 아침에 내 친구 엉덩이 의자와 함께 꽃을 심었다. 언젠가 기술이 더 발전해서 작은 단말기로 향기까지 전해줄 수 있는 날이 오면, 난 가장 먼저 비 개인 날 아침, 흙냄새를 전해주고 싶다.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옮겨 심으며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다는 꼬마자동차가 생각났다. 호미질 한번 더 할 때마다 땅에서 피어나는, 꽃향기 같은 흙향기를 맡고 힘이 솟는 아침. 흙향기 가득한 땅에 어린 꽃을 심으며 벌써 가을을 기다리게 되는 아침. 해바라기가 말갛고 환한 그 얼굴을 보여줄 날을, 코스모스가 색색으로 피어 나 좀 보라면서 한들한들 춤을 출 그 날을 기다린다. '꽃 같은 거, 난 별로.'라며 관심도 별로 없던 내가 이 산골에 와서 다 자라지도 않은 해바라기와 코스모스에 이렇게 행복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흙이 주는 변화, 생명이 생명을 낳는 변화를 몸소 체험하는 일상. 책에서는 짐작만 할 수 있고, 흙밭에 나가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게 있다. 호미를 들어야 알 수 있는, 땀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사소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