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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Dec 13. 2016

그런 시가 있다. 그냥 좋은 시.

봄밤 - 김수영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시의 이야기를 해석해 보려고도 했고, 시의 행보를 따라가며 어디에 닿았는지 따져보려고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시가 있다. 

이 시의 어떤 구절이 맘에 들고, 어느 표현이 가슴을 치는지 줄줄 말할 수 있는 시.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그러니까 어디가 좋은지 왜 좋은지 하나도 말할 수가 없는데 

그냥 가슴이 아프고 저릿해지기도 하며 자꾸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게 되는 시가 있다. 

이 시가 바로 그런 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다시 읽고 싶은 시.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는 문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가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에서 멈추기도 하고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의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봄밤'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다시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자꾸만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은 시, 

소리 내어 읽고 속으로 끙끙대며 읽고 눈 감고도 선하게 읽고 싶은, 

이 시는 내게 그런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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