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빛 - 남진우
저녁빛
남진우
붉은 저녁해 창가에 머물며
내게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하네......
붉은빛으로 내 초라한 방안의 책과 옷가지를 비추며
기나긴 하루의 노역이 끝났다 하네......
놀던 아이들 다 돌아간 다음의 텅 빈 공원 같은
내 마음엔 하루 종일 부우연 먼지만 쌓이고......
소리 없이 사그라드는 저녁빛에 잠겨
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먹임에 귀기울이네......
부서진 꿈들......
시간의 무늬처럼 어른대는 유리 저편 풍경들......
어스름이 다가오는 창가에 서서
붉은 저녁에 뺨 부비는
먼 들판 잎사귀들 들끓는 소리 엿들으며
나
잠시 빈집을 감도는 적막에 몸을 주네......
오늘의 시를 찾으려 시집을 막 펼쳤는데 어머님이 전화를 하셨다.
송년모임이 있어서 가신다고 했으니 아직 끝날 시간이 안 되었는데 말이다.
같이 일하시는 아주머니의 남편이 배를 타는 분이신데,
그분이 게를 많이 잡았다며 나눠준다고 해서 모임도 채 마치지 않았는데 그 게를 가지고 오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oo아, 너 게장 먹니?' 하고 물으시는데,
'먹는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정말 솔직하게는 '좋아한다'라고 말씀드렸어야 옳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어머님의 말씀.
'아버지가 게장을 좋아하셔서 자주 담갔었는데, 너 먹는다고 하면 오랜만에 게장 좀 담그려고.'
나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한 손에 게를 한 봉지 들고 다른 한 손엔 전화기를 들고 걸으시면서 통화를 하시느라
숨을 살짝 헐떡이시며 상기된 목소리였지만,
나는 어쩐지 아무도 없는 빈 집에 그 게를 들고 들어가서
아들은 먹지도 않는 게장을 며느리 먹이려고 애써서 담글 어머님이 떠올라 울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를 읽는데 마음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다.
어쩐지 어머님이 이런 기분을 자주 느끼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을 때,
평생을 함께 한 남편도 이제는 세상에 없고
내 속으로 낳은 자식들도 타지로 떠나 버린 텅 빈 집.
아무리 좁은 집이라고 해도 너무 넓게 느껴질 그 집.
우리 어머님은 씩씩하신 분이라 그런 내색을 잘 하지 않으시지만
왜 그런 순간이 없겠는가.
어스름이 다가오는 창가에 서서 먼 들판에 잎사귀 들끓는 소리까지 들리는 적막 속에
나만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이.
부모 자식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 한 여자로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이 있었나 싶어 부끄럽다.
더 마음을 써야겠다고 다짐해본다.
ps.
오늘 이런 갸륵한 마음이 드는 건
어머님이 내가 좋아하는 게장 담가주신다고 해서 이러는 게 절대 아니다.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