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틴 May 15. 2021

이사의 역사

철새의 모든 날갯짓은 삶의 자산이다

나는 남들보다 주민등록등본을 뗄 일이 많았다. 이직이 잦았으니 등본은 몇 통씩 미리 떼 두었다. 게다가 개명까지 해서 주민등록초본도 종종 요구받는다. 한 번은 주민센터에서 초본을 떼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 별생각 없이 '주소지 변경 이력'을 포함했더니 담당자가 서류 한 움큼을 내 앞에 쏟아놓았기 때문이다.




2021년 5월, 몇 번째인지 모를 이사를 또 앞두고 있다. 재작년에 초본을 확인했을 때가 16번 남짓이었는데. 그나마 이직 횟수보단 적다. (ㅎㅎㅎ)


나는 독립을 20대 중반쯤에 했다. 사실상 가출에 가까운 모양새였는데 나의 홀로서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신입사원 월급으로 정확히 500만 원을 모아 고시원에 들어갔고 이를 시작으로 수많은 동네를 거쳤다. 방을 구할 때의 기준도 명확했다. 회사에서 30분 이내 거리로 지하철역과 가까우면서 주변에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곳이어야 한다.

그런 나에게 전세/매매는 다른 세상 얘기다. 친구들이 월세 낼 돈으로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이자를 내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것도 한 군데에 진득하게 있을 때나 해당되는 얘기. 회사를 쫓아 철새처럼 이동하는 삶에 전셋집은 비효율적이라 여겼다. 그러니 이사가 더욱 쉬웠고 여러 동네에서 살아보는 자체만으로 설렜다. 


이사를 가면 전입신고는 필수!! 합정, 신촌, 구로, 신림, 봉천, 쌍문, 복정, 제주, 분당 정자동, 용인 수지 등 전입신고를 했던 지역도 다양하다. 영등포 쪽으로 출근할 때는 합정, 구로디지털단지와 강남권에 취업을 하면서 신림, 봉천 쪽을 찾았다. 원룸이 많은 지역일수록 괜찮아 보인다고 덥석 물지 말고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니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가거나 후미진 곳, 1층, 옥탑방은 피했고 공동 출입문에 비밀번호가 걸려있으면 더욱 좋았다. 수압은 괜찮은지 세면대 수도꼭지도 틀어보고 채광은 충분한지 확인한다.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월세가 좀 더 비싸지므로 계단식 원룸 건물의 3층을 주로 골랐다.

풀옵션은 기본, 입주 후엔 TV 시청을 하지 않으니 TV수신료 차감도 신청한다. 편의점과 마트는 근처에 꼭 있어야 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는 길도 위험하진 않은지 살폈다. 이렇게 많은 걸 고려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돈. 마음에 들수록 월세는 높기 마련이니 안전해 보이고 깨끗한 집이면 일단 계약했다.


회사가 분당으로 이전하면서 집도 서울을 벗어났고, D사에 들어가면서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1년 후, 조직개편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야 했고 그다음 해엔 내 의지로 부서이동을 선택해서 제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사주를 보러 가서 역술인이 역마살을 언급할 때마다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제주에서도 역마살이 발동할 줄이야.


지금까지 쓴 이사비용과 중개비만 아꼈어도 웬만한 중고차 1대는 뽑고도 남았을 거다. 게다가 제주로 이사를 2번 왕복하면서 새 차를 2번이나 뽑아봤다.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고 나니 제주살이가 너무 좋아서 평생 제주에 정착하고 싶었다. 역마쟁이가 제주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이때는 돈보다 내가 원하는 삶에 더 집중했고 그게 가능한 시기였다.

그렇게 철새 같던 인생이 제주살이를 하고 나서 바뀌었다. 워라밸과 저녁이 있는 삶,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삶,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삶, 한 군데에 정착하는 삶. 제주는 확실히 내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이때의 경험으로 집을 고르는 기준이 더 높아졌다.


'안전하고 깨끗하면서 너무 북적이지 않고, 근처에 나무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돈도 없는 주제에 눈은 이렇게나 까다롭다. 이직을 하지 않고 한 군데에서 버텼더라면, 이사도 두세 번으로 줄였더라면, 제주에서 차를 사지 않았더라면, 여유 있을 때 해외로 떠돌지 않았더라면 웬만한 전세비용은 모였을 텐데. 쓸데없는 상상을 잠시 해본다. 


하지만 그간의 시행착오와 짬밥이 있었기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겠지. 과거로 돌아가서 돈과 경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내가 겪은 것들은 모두 삶의 자산이다. 이 자산이 모여 돈과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 주면 또 새로운 곳에 전입신고를 한다. 여전히 내 경험은 현재 진행 중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현재를 즐기고 오늘을 즐기고 지금을 즐기는 거다. 말은 쉽지만 알고 보면 정말 쉬울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내 마음의 처방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