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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민 Apr 04. 2022

바람

문득 찾아오는 그 바람

후끈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정확히 설명할 단어는 없지만 누구나 알법한, 딱 적당한 그 온도의 바람이 좋다.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물어볼 수도 있지만 나는 특히 좋아한다. 


겨울의 칼바람 혹은 여름의 찜통 습기가 잦아들고 15~25도 사이 어딘가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사람 마냥 한강, 바다, 루프탑, 가리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간다. 바람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간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맥주나 와인, 라면을 먹고 있자면 원래도 좋아하는 것들이지만 “행복해, 행복해”라는 말이 절로 입에서 새어 나온다. 꼭 멀리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열어두고 그 옆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거나, 두 개 이상을 동시에 하고 있을 때면 내 인생이 꽤나 마음에 든다.


어떤 특정 날씨를 좋아한다는 것은 세런디피티(Serendipity)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뜻밖의 발견(을 하는 능력), 의도하지 않은 발견, 운 좋게 발견한 것,” 그것이 세런디피티이다. 좋아하는 날씨란 자고로 없으면 슬프고, 있으면 즉각적으로 행복해지지만 아무리 좋아한다 한들 찾아갈 수도, 돈 주고 살 수도 없다. 물론 추울 때면 더운 나라로 떠날 수 있고, 더울 때면 추운 나라로 떠날 수도 있지만, 떠난 그 나라 또한 날씨를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지역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자유가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래 머무르던 장소에서 속수무책으로 날씨를 겪는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좋아하는 날씨를 마주하게 됐을 때는 운 좋게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계획하는 것을 좋아했다. 목표치를 세워놓고, 시간 단위로 달성해야 하는 중간 목표들을 세워두었다. 그것들을 달성했을 때는 나에게 보상을, 실패했을 때는 벌칙을 줬다 (‘쪽지시험 95점 이상 받으면 그날 저녁 엄마한테 치킨 시켜달라고 하기’ 따위의 것들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습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다이어트해서 2킬로 감량하면 가고 싶었던 브런치 가게 가기’ 따위의 계획들이 다이어리에 즐비하게 적혀있는 식이었다. 


하지만 먹은 밥공기 수가 늘어날수록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점점 많아졌고 그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회인으로서 세우는 계획들은 나 혼자 잘해서 이루기 어려운 계획들이 많았다. 누군가 승인을 해줘야 하고, 누군가 정보를 줘야 하고, 누군가 협조를 해줘야 했다. 25살의 나이에 돌연 챙겨주는 사람도 없는 직장인이 된 나는, 회사 외부 사람들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하는 일이 무수하게 많았고, 그럴 때면 통화하기 전에 첫마디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스크립트를 전부 적고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발걸음과 같은 손가락질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게다가 계획대로 된다고 해서 또 매번 행복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올해는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해야지. 안 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지만 이러다가는 청춘이 하염없이 흐르기만 할 것 같았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같은 자리에 있는 내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하기 싫은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프로젝트를 꾸역꾸역 마무리 지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 대표님의 양해를 받고 해가 아직 높을 때 퇴근 한 나는, 왜인지도 모르는 채 힘 없이 심해로 빠져들어가는 우울감을 느꼈다. 그토록 원했던 건데, 그래서 계획도 열심히 세워서 하나하나 해치웠는데, 나 왜 이렇게 우울해?


계획하지 않았는데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멤버 구성이 너무 희한해서 죽기보다 가기 싫었는데 내 인생에 손꼽을 만큼 소중하게 남은 강릉여행. 저 오빠랑 연애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하고 다녔지만 어느새 잡은 손을 놓기 싫어졌던 사람과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어느 날 머리칼을 흔드는 적당히 시원한 바람. 예상치 못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울고, 웃고, 행복해하다 보니 철저하게 계획적이었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세런디피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갑작스레 찾아오는 바람이 좋다. 그전 주가 아무리 추웠어도, 전 날 아무리 비가 오고 후덥지근했어도 어느새 시원해진 바람이 불어올 때면 그저 행복하다. 나에게 적당히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은 인디언 기우제와도 같다.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간절히 바라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다만 그게 이루어졌을 때 알아차릴 마음의 여유를 안고 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요즘도 집을 나섰을 때, 지하철에서 나왔을 때, 내가 좋아하는 바람이 불 때면 5초라도 좋으니 잠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바람을 있는 그대로 느끼려고 한다.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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