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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민 Oct 20. 2022

원망

바뀔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

나는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종종 부모님을 원망했다. 상위 몇 프로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매일 남부러울 것 없이 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만 남부러워면서 대체로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얻어야 할 것을 얻으며 살아온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스러웠던 이유는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 인정 욕구에 대한 집착이 다 부모님에게서 기인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며 심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쯤, 추진하던 일이 또다시 엎어지면서 누적되어왔던 좌절감이 하루에 와르르 쏟아지던 날이 있었다. 꺽꺽 거리며 울다가 결국 핸드폰으로 온라인 상담 어플을 깔고, 상담사 분이랑 대화를 시작했다. 기억하는지도 몰랐던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는데, 웬걸 부모님이 정말 미웠다.


학창 시절 부모님은 무리하게 교육비에 투자하면서 나의 교육비에는 꽤나 큰돈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거듭 상기시켰다. 그리고 성적이 평소보다 저조했던 어느 날, 성적표를 본 엄마는 그 돈에 비해 성과가 나지 않으면 투자를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취직 준비를 하던 시절, 가고 싶었던 회사에 떨어져서 힘들어하는 나에게 아빠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인생사 운칠기삼이라면, 칠 할을 차지하는 운이 좌지우지 못하게  합격 기준을 나머지 삼 할인 '기'로 채웠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회사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려고 시작한 상담에서 한참 지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이 아니러니 했으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나에 대한 투자 대비 성과'를 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인식하며 살아온 듯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많지도 적지도 않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그리고 상급자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거듭 칭찬을 받으면서도, 내가 그만큼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아, 혹은 남들만큼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매일매일을 괴로워했다. 그렇게 괴로운 와중에도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다 내 탓이고, 아직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이 없으니 더 인내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때 그런 말을 안 했더라면, 아빠가 그런 말을 안 했더라면, 내가 공부를 좀 못하고 덜 열심히 해도 나를 있는 그대로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었더라면. 아니, 그렇게 표현해주었더라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못난 모습으로 망가지더라도 받아줄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마음으로 느껴지고 공감되지 않아, 나는 계속 불안해하고 나를 채찍질하게 되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나의 깊은 마음속 금쪽이는 그랬다.


그렇게 괴롭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의 지나온 짧다면 짧은 시간들을 되돌이켜 봤을 때,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바꿀 수 없는 일과 바꿀 수 있는 일, 그리고 그 둘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게 될 때쯤, 나는 엄마 아빠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에 결혼을 했었다. 그 시절 많은 여성들이 으레 그랬듯, 시집살이에 시달려야 했고, 친정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 딸들에게 줄 돈도,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 남편 일 때문에 말도 안 통하는 개발도상국 나라에 똑떨어져 20년 가까운 삶을 보냈다. 일과 회식으로 집에 있는 시간보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더 많은 남편에게 기댈 여지가 없어, 먼 타지에서 혼자 외국어를 배우고,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을 다니고, 혼자 가계를 꾸려갔다.


아버지는 나보다 4살 많은, 그러니까 지금 우리 오빠의 나이에 결혼을 했었다. 그 시절 많은 남성들이 으레 그랬듯, 열심히 취직 준비를 하고, 영어 사전을 달달 외워서 대기업에 입사를 했다. 하지만 시골에 있는 온 가족이 자신만을 바라보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 자신의 삶과 성과는 모두 그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라는 부담을 안고 매일매일 고통스러운 출근을 이어갔다.


그러니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주는 게 제일 좋을지. 나는 회사에서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문장에 이 단어를 넣을지 말지 조차 알기 어려워 머리가 아픈데, 나와 비슷한 나이에 두 명의 생명체를 삶을 책임지는 일, 그것도 어른의 지도와 조언 없이 해내는 것의 어려움을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그들이 설령 방법을 알았다 해도 마음의 여유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과 실행은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야속하게도 그림자 뒤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모르는 와중에 고민하고, 선택하고, 또 많은 것을 포기하며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 그들이 나에게 보태온 시간은 이제 바꿀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는 그들의 최선의 결과이다. 최선은 꼭 최고를 의미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최선은 의미 그대로 그 시점에 그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최대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흘러 흘러 오늘의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최선을 인정하는 것, 거기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 등 나의 마음과 태도일 것이다. 난 이제야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지혜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기 위한 용기를 조금씩 배워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는 너무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에 그들을 원망할 수도, 해서도 안된다는 것 또한 조금씩 배워내고 있다. 어쩌면 나는 감당 안 되는 속상함을 해소하기 위해 탓해야 할 대상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사실 내가 부모로 인해 잃은 것이 물고기라면 내가 부모로 인해 얻은 것은 바다와도 같다. 지식에 대한 아버지의 끈기는 내가 지속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알아가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자세로 이어졌고, 새로운 것에 대한 어머니의 호기심은 내가 운동, 미술, 음악, 문학 등 다방면에서 관심을 가지고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들이 포기하고 감내한 덕에 남들보다 할 줄 아는 게 많고, 겪어본 게 많고, 경험해본 게 많다. 이는 내가 더 잘 살아가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발이 되고, 손이 된다.


잘은 모르지만 니체는 인생은 동일한 것의 반복, 즉 '영원회귀'로 바라본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시간을 되돌려 특정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아마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우리 엄마도 그렇고, 우리 아빠도 그렇고, 나도 그럴 것이다. 그게 아무리 고통스러웠다 한들 그 덕에 삶의 즐거움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니체는 이렇게 외치겠지. "그것이 삶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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