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74.8cm
내 키는 174.8cm이다. 3년 전 건강검진 때 병원에 잰 수치인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주변 친구들과 비교해 봤을 때 175에 가까운 키라고 볼 수 있나 의심된다. 어쨌든, 정량적으로 확인한 마지막 수치이다.
엄마는 나에게 어깨 피고 앉으라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신체적 원인이다. 성장기 동안 짧은 기간 안에 키가 훌쩍 커버린 나 같은 사람들은 허리가 대체로 안 좋다. 심할 때는 척추 측만증 때문에 신경차단 주사를 맞을 정도였다. 아침에 멋모르고 케틀벨로 스쿼트를 하다가 찔린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사회적 원인이다. 자세가 사람을 만든다는 엄마의 지론이다. 자세가 올곧은 사람은 타인에게도 올곧은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본인도 올곧은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다. 후자는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실제로 검증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라는 게 하루 아침에 고쳐지지가 않는다. 29년 인생 내내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집 식탁에 앉아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벽에 걸린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인다.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내 굽은 어깨 모양에 내가 흠칫 놀라기도 한다. 만약 완만한 등의 곡선이 직각 어깨처럼 미의 기준에 부합했더라면 그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찍어 올리고 싶을 지경이다.
어깨를 피라고 하는 엄마의 말뜻처럼, 내 굽은 등이 자리를 잡은 배경에도 신체적 원인과 사회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일단 신체적인 원인은, 키에 비해 허리가 길기 때문이다. 개리 마커스의 책 <클루지>에 따르면, 한 개의 척추가 지탱하는 사람의 몸은 직립보행에 전혀 최적화가 되어 있지 않은 구조라고 했던가. 175에 달하는 키 중에서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의 상체를 가냘픈 단일 척추 혼자 지탱하기에는 무리일테다. 그러니 제 몫을 수행해내기 버거워 하는거다.
사회적 원인이라 하면, 키 큰 게 안 좋은 줄 알고 살았다. 최근까지도. 어린 시절부터 보는 사람마다 “키 커서 좋겠다~” 했지만 그건 대부분 나이 지긋한 아줌마, 아저씨들의 소회였고, 나의 또래들 사이에서 키 큰 “여자”(여자에 방점이 있다)는 그다지 부러운 대상이 아니었다. 자고로 여자는 소녀시대 태연 같이 작고 아담한 게 매력이며, 남자들의 이상형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를 시작으로, 남자애들은 다 내 주변에 서 있기를 꺼려했다. 나이와 함께 키에 대한 남자애들의 예민함도 같이 자라날 시기, 나와 남자애들의 간격도 비례하게 늘어나는 듯했다. "박혜민 옆에 안서야지!" 반은 장난이고 반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말이었을테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마음에 그 말들이 콕콕 박혔다.
엄마와 아빠는 딱 167cm에서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커버렸다는 이야기를 자주 내 앞에서 했다. 친오빠는 여자 아이돌 나인뮤지스를 가리키며 키가 너무 큰 게 문제가 아니라, 비율과 몸매의 문제라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하고 날씬한 여자애들이 부럽기는 했으나, 그래도 괜찮았다. 학생의 본분은 남자애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아닌 공부를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니터로 소녀시대 태연 사진을 보다가도 기분이 침전할 때면 컴퓨터를 끄고 교과서를 꺼냈다. 아담하고 날씬하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면 내 자존감을 깎아먹지 않으면서 공동체 속 내 자리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는 달랐다. 남자애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제1 과업처럼 느껴지는 세계관 속 섬에 나는 예고도 없이 던져졌다. 페이스북이 가장 인기 많은 SNS 플랫폼이던 시절, 피드에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 패션,’ 남자들이 환장하는 여자 향수’ 같은 게시글들이 범람하던 시기였다. 거기에 여자 키 172cm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키가 컸다.) 친구가 소개팅을 주선해주다가도 내 키를 알게된 남자들은 정중하게 소개를 거절했다. 이런 나의 절망감에 기름을 부으려는 목적인지, 남자 선배와 동기들은 “와, 혜민이 키 때문에 근처에 못 가겠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인뮤지스만큼 비율 좋고, 날씬하고, 예뻤어도 나한테 저런 말을 할까 속으로 고민했다.
그 덕에 자동번역기가 원시적이던 시절, “키가 크시네요” 하는 낯선 이의 무미건조한 코멘트는 “키가 너무 크시네요”로 내 머릿속에서 자동 통역 되었다. 악의가 없는 말이라도 상관 없었다. 하이힐은 절대 사지도, 신지도 않았다. 굽이 높은 운동화의 디자인이 아무리 예뻐도 절대 구매하지 않았다. 머리 셋팅을 하면서도 머리카락 뿌리에 뽕을 살릴지 말지 고민했다. 긴 원피스는 사지 않았다. 키를 더 커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 어깨도 점점 굽어갔다. 원래도 중고등학교 내내 공부하면서 굽어있던 등이지만, 공부를 멀리하던 대학생활 중에도 내 어깨는 굽어있었다. 어깨를 피면 1-2센치는 거뜬히 더 커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앉아있을 때는 더더욱 어깨를 피지 않았다. 어깨를 잠깐이라도 피면 "오오 박혜민 상체 나보다 길어"라며 옆에 있는 남학생이 꼭 한 마디를 거들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커뮤니티 속에서 4년 넘게 물들어 가고 있던 와중, 강의실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난 이후로 남편은 단 한 번도 “키가 너무 크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남편은 엄청난 장신이 아님에도 한 번도 나에게 키를 가지고 농담을 한 적이 없다. 내 옆에서 위축된다고 한 적도 없다.
연인이 되고 난 후에는 '옷발이 정말 잘 받는다', '늘씬해서 예쁘다' 같은 말을 습관처럼 했다. 이 사람 앞에서 나의 키는 그가 애정하는 나의 천만 가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한 듯했다. 그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이 단단한 이가 가진 언어의 감촉을 생각한다. 그 부드러운 감촉으로 다듬어지는 내 마음과 어깨의 굽은 곡선은 입술 끝에서 조금씩, 조금씩 올곧아진다.
그가 이토록 애정에 능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애정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 자신을 어떻게 애정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줬다. 그가 나를 애정하고 자신을 애정하는 방식을 모방하며 나는 조금씩 학습했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자신감 있는 말 하기와 같이 품이 드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 표면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거였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예컨대 짧게 다져진 손톱, 눌리지 않은 뒷머리, 보송한 냄새가 나는 티셔츠를 가꿨다. 하지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예컨대 기능과 무관한 근육 모양, 얼기설기한 눈썹 라인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해도 개의치 않았다.
다수가 정답이라고 가리키는, 함부로 재단하는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이런 거구나. 이렇게 하는 거구나.
대학시절을 지나, 사회 초년생을 지나,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나는 가끔 예쁜 옷을 한 껏 두르고 문 밖을 나서며 엄마의 말대로 어깨를 핀다. 20여 년을 굽은 채로 살아온 등이 하루아침에 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핀 자세가 아주 편하지는 않다. 그리고 종종 건물 유리에 비친 내 전신을 보며 허리가 너무 길고, 종아리가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삶이 20여 년 보다 길 테니 쉽게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굽은 등처럼 사람의 사고 회로도 하루아침에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는 나는 하이힐을 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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