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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Feb 08. 2019

영화 <서프러제트 (2015)> 리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영화로 옮겨오는 데엔 참 다양한 방법이 있다.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같이 픽션을 가미하는 방법이 있고, 놀란의 <덩케르크>처럼 건조한 영상언어를 통해 재현의 미학을 달성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서프러제트>는 가장 전통적이고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예술영화도, 대중영화도 아니되 다큐멘터리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으나, 참정권을 위해 투쟁한 여성들을 스크린 위로 가장 적절한 방법을 통해 초대했다. 카메라는 가장 필요한 앵글을 잡아내며, 스토리 편집도 깔끔하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을 인물의 성장 서사를 통해 관객은 법의 부당함을 통렬히 느끼게 된다. 따라서 에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와 같은 유명인사가 아니라,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략은 유효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 점이 영화의 약점이 된다 해도.


<서프러제트>는 담고 있는 메시지가 강력한 것은 물론이요 그 힘을 시기 적절한 순간에 터뜨릴 줄 아는 영화다. 자칫하면 유치하게 전달될 수 있던 모드 와츠의 대사가 주요 명대사로 꼽히는 것이 한 예이다. 더불어 고요한 단식투쟁에 대항하는 영국 정부의 태도는 그 자체만으로 분통을 터뜨리기에 충분하지만 그 순간과 형사 아더 스티드 (브렌던 글리슨)의 눈을 교차시켜 상황 자체의 부당함, 기울어진 운동장을 효과적으로 묘사해낸다는 점은 그야말로 훌륭하다. 



이 영화는 많은 점에서 독보적인데, 그 중에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배우들의 연기였다. 메릴 스트립, 헬레나 본햄 카터, 캐리 멀리건들의 감정 연기는 두말할 것 없으나 벤 휘쇼의 소니 와츠는 너무나도 평범한 영국 남성의 모습이었고 브렌던 글리슨의 아더 스티드 역시 온전히 정부의 편도, 온전히 모드 와츠의 편도 아닌 그 어드메에서 균형을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분노하는 측의 분노와 침묵하는 자의 침묵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지점이 영화 곳곳에 숨어있으며 그 때마다 나는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끝내 탄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수감이나 죽음 따위가 아니라 일상의 상실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고 나아질 것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철학이 한 뼘 두 뼘 일궈내고 이룩한 세상이라는 것. 


생각해 보면 근 백 년간 참 많은 것이 변했다. 기술도, 사상도. 나는 아직도 우리가 과도기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역사 자체가 과도기의 총합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러 측면에서 우리는 유사 이래로 계속되어온 갈등을 여전히 겪고 있다. 몇 천 년간 계속된 문제라면 포기할 법 한데도 이토록 비틀거리며 이다지도 힘들어 하면서도 사람들은 늘 세상을 바꾸려 한다. 그렇게 나아갈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이들, 귀 기울이는 이들, 연대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오늘 하루쯤은  우리가 각자 나름의 투쟁 끝에, 결국은 자신이 바라던 유토피아에 모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을 품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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