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예비 수업에 세 번째로 간 날
한국 여행 이후 세 번째로 학교 수업을 간 날이었다. 아침부터 유독 불안했다. 평소에도 말 잘 안 듣는 날이 많지만 이날은 유독 말을 안 들었다. 학교도 가기 싫고 유치원도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겨우겨우 입혀서 차를 태웠다. 그래도 가면 잘하겠거니 하면서 같은 유치원 반 친구인 니콜라스 손을 잡아주며 그날도 그렇게 수업에 보냈다. 한 시간 동안 집에서 후다닥 밥을 먹고 잠시 할 일을 정리한 후에 다시 학교로 향했다. 멀리서 니콜라스가 아닌 선생님 손을 잡고 오는 범수가 보였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선생님 얼굴을 보니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오늘 범수가 계단에서 뭐를 했다고 말하셨다. 집에서도 한 번 더 지도를 해달라고 당부하신 말씀까지 알아들었지만 뭘 했다는 건지 단 하나 그 동사를 알아듣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다시 물어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니콜라스가 울고 있었다.
용기내서 같이 유치원 가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니콜라스가 울고 있어서 대충 눈인사만 하고 지나쳐서 유치원에 갔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나는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학교 메일 주소를 찾아 메일을 남겼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잘 알아듣질 못했다고 혹시 확인해 주실 수 있냐고 메일을 보냈다. 학교는 즉각적으로 답이 왔다.
범수가 계단에서 니콜라스를 밀었어요.
'미... 밀었다고????' 난 정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지난번에 놀이터에서 딱 한 번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기보다 어린 친구를 막 달려가서 민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상상이 되어서였는지, 아니면 크게 사고가 날 수도 있어서인지, 말도 못하게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때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집에 가다가 유치원에 들러서 니콜라스가 괜찮은지 보고 유치원 선생님께도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치원에 도착했다 픽업하는 시간이 아니라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고 하셨고, 나는 곧바로 일어난 일을 공유했다. 그리고 범수 좀 불러달라고 했다. 범수가 나왔다.
"범수야, 오늘 니콜라스 밀었어??"
"안 밀었어."
"선생님이 밀었다고 하던데?"
"어깨로 쳤어. 친 거랑 민 거는 다른 거야."
갑자기 너무 똑똑하게 말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마음을 겨우 진정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범수야, 계단은 위험하니까 친구를 밀거나 치면 절대 안 되는 거야. 알겠어?"
"알겠어."
내가 심각한 얼굴로 애를 붙잡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유치원 선생님이 나와서 나에게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다고 자기가 니콜라스한테 물어보니까 많이 안 다쳤다고 괜찮다고 했다고, 범수나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말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무래도 학교에 자폐 진단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말했더니 유치원 쌤이 그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자기 생각에도, 아마 그러면 더 선생님이 주의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고, 내 생각도 동일했다.
나는 학교 선생님께 장문의 메일을 썼다. 물론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했다. 이제는 가끔 내 손으로 쓰기도 하지만 많은 양을 빠른 시간 내에 써야 하므로...
Liebe Frau Liesa,
ich war sehr überrascht und es tut mir wirklich leid, was heute passiert ist.
Bomsu hat Ende Juli die Diagnose Autismus (frühkindlicher Autismus) erhalten.
Da es im Kindergarten bisher – abgesehen von kleinen Situationen – keine größeren Probleme gab, dachte ich, dass es auch im Vorkurs gut funktionieren würde.
Aber ich merke, dass es wohl hilfreich ist, diese Information mit Ihnen zu teilen.
Bomsu bekommt derzeit Förderung in Sprache, Ergotherapie und Heilpädagogik.
Wir haben heute ausführlich mit ihm über den Vorfall gesprochen,
und er hat selbst gesagt, dass er das nicht mehr machen wird.
Wir erklären ihm immer wieder, dass man niemanden verletzen darf –
besonders, weil er auch einen drei Jahre jüngeren Bruder hat,
mit dem wir viel über Rücksicht und Selbstkontrolle üben.
Trotzdem fällt es ihm manchmal schwer, wenn er müde oder gestresst ist.
Wir werden zu Hause besonders darauf achten und weiter mit ihm daran arbeiten.
Bitte lassen Sie uns wissen, falls aus Ihrer Sicht noch weitere Schritte oder Unterstützung nötig sind.
Vielen Dank für Ihr Verständnis und Ihre Geduld.
Mit freundlichen Grüßen
Hyeonji Park
리자 선생님께,
오늘 있었던 일로 놀라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범수는 7월 말에 자폐(영아기 자폐)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유치원에서도 – 작은 상황들을 제외하면 –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Vorkurs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고 보니, 이 정보를 선생님께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범수는 현재 언어치료, 작업치료(Ergotherapie), 그리고 치료교육(Heilpädagogik)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도 범수와 이 일을 충분히 이야기했고,
범수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저희는 항상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점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범수에게는 세 살 어린 동생도 있기 때문에
집에서도 배려와 자기조절을 많이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가끔 어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저희도 집에서 더 신경 쓰고 계속 함께 연습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더 필요한 지원이나 조치가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이해해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박현지 드림
그랬더니 선생님의 회신이 갑자기 친절해졌다. 해당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다고 오늘 자기가 문을 잠그고 있어서 정확한 상황은 보지 못했다면서 범수가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면서 그 계단이 조금 높아서 둘이서 손잡고 내려가기엔 조금 위험하다고 한 명씩 다니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날 오신 하일패다고긱 선생님과 얘기하면서 힌트를 얻었는데 아마도 니콜라스가 범수 손을 잡으려고 왔는데 자리가 비좁다고 느낀 범수가 어깨를 살짝 쳤을 것 같다.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긴 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이렇게 매순간 조마조마한 일인 걸까? 범수가 자폐라서 더 그런 걸까? 누군가에겐 별일이 아닐 수 있겠지만 진단을 받은 아이라 그런걸까? 내가 그래서 더 크게 생각하는 걸까? 다음에 또 큰 사고로 이어질까봐 걱정되는 마음에 더 그런 걸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 다음주 수요일 에르고테라피 선생님께서는 유치원 선생님 말대로 별일 아닐 수도 있고 내 말대로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고 범수가 과부하가 걸려서 조절이 안 되면 충분히 쉬게 해주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고. 자기도 저번주에 얼굴을 맞았다고... 또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주셨다. 하지만 나 놀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범수는 잘못이 없고 자기가 테라피스트인데 더 잘 알고 대처를 했어야 했다고 바로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집에 가서 범수 혼내지 말라고. 혼내기보다는 설명하는 방식으로 차분하게 알려주는 게 더 효과가 클 거라고 조언도 해주셨다.
당장 스트레스받고 너무 놀란 나였지만 이 모든 일들,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범수와의 사소한 마찰들을 겪는 것이 내가 범수가 자폐스펙트럼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