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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권 그 다음 과제

우리 네 식구를 위한 진짜 우리집 찾기

by 팬지

나는 프리랜서 번역가다. 남편도 프리랜서다. 우리는 직장이 없다. 그래서 영주권을 받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비자를 갱신할 때, 영주권을 신청할 때 늘 항상 수익을 염두에 뒀다. 물론 벌어야 먹고 사는 것도 있었지만 먹고 살 만큼 벌어야 거주 허가도 원활하게 받을 수가 있었다. 크게 신경 안 쓰고 살고 싶은데, 그럴려면 일단 영주권을 받고 그런 뒤에는 집을 사야 한다. 대출 심사까지 통과만 되면 독일 수익을 신경 안 써도 된다. 한국에서 수익이 나든 독일에서 수익이 나든 누군가의 허가는 받지 않아도 되니까 최소 금액을 맞춘다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자잘하게 생활비 때문에 환율이라든지 독일 건강보함료가 너무 높아지지 않게 신경 쓰긴 해야겠지만 이런 계산들은 거주 허가나 대출 심사에 쏟는 신경과 걱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주 허가나 대출 심사는 그야말로 우리 삶의 방향을 좌우하며 삶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 매달 수익, 지출 과 관련된 생활의 불편과는 차원이 다른 걱정거리이다. 근간에 대한 걱정거리 1번이 영주권을 받자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제 2번이 남았다. 대망의 집 구매!

외국인이 집을 구매한다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돈이 아주 많아서 바로 집을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다 해도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하물며 난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다. 여기 정착하며 마이너스 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아주 제한된 예산으로 집을 구해야 한다. 처음에는 예산을 얼마로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도 없었다. 영주권 받기 전이었지만 올해 봄부터 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저기 집도 찾아보고 자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대출을 얼마 정도 받을 수 있을지 알아버기 시작했다. 이집 저집 잠깐 발품도 팔아보고 집이 저렴한 다른 지역으로도 가 봤는데 그와중에 7월에 범수가 자폐 진단을 받아버린 것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제약이 생겨버렸다. 다른 주는 어떻게 운영하는지 모르겠지만 바이에른주의 복지에 꽤나 신뢰가 있던 나는 이제 바이에른주를 벗어날 엄두를 못 내게 되었다. 바이에른주는 조금 교외에 있는 동네에까지 그런 복지 사각지대가 잘 없다. 기관도 많고 어느 지역보다 체계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대도시로 가면 그만큼 대기도 길지만 말이다.

진단 이전에는 범수가 조금만 더 가르치면 금방 또래 아이들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사라져 지금 받고 있는 치료들이 범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하고 있다. 이걸 도중에 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린 뉘른베르크에 머물 수도 없다. 집이 아주아주 비싸기 때문이다. 웬만한 하우스는 이제 10억이 훌쩍 넘는다. 우리는 그만한 금액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좀 저렴한 집도 있긴 하지만 어마무시하게 수리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조건 교외로 나가야 한다. 뉘른베르크에서 한 시간, 또는 한 시간 반 거리로 가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이 드문드문 나온다. 물론 그 예산대에서 안 고쳐야 되는 집은 잘 없다. 고칠 예산도 생각해야 하고 입주전에 다 못 고치는 경우 입주 전 필수 리모델링 비용, 입주 후 리모델링 계획 및 비용 산정 등을 해 보고 언제쯤 대출금을 모두 완납할 수 있을지 월 고정 납부액은 얼마일지 모두 계산하는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주변 인프라를 살펴봐야 한다. 그 작은 동네에 슈퍼마켓, 일반의, 소아과, 약국, 유치원, 학교가 있는지 모두 살펴봐야 하고 특히 범수가 갈 수도 있는 통합학교는 차로라도 통학이 가능한지, 자폐 치료 센터는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지, 이 모든 것을 고려해서 집을 살펴보고 나면 하루 내 시간을 다 뺏기고 만다.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할 일들이 잔뜩임에도 장기적으로 앞날을 위해 집을 찾고 피난츠베라터(대출 상담사)에게 확인하고 계산하고 구글지도를 켜고... 한국 다녀온 뒤로 이짓을 계속했던 것 같다. 눈도 퀭해지고 너무 피곤하지만 우리의 보금자리를 위해 내 눈과 손은 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아주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당장 고칠 필요도 없고 공간도 적지도 많지도 않고 아주 적당한 집이었다. 게다가 도보 4분 거리에 슈퍼가, 8분 거리에 유치원이, 15분 거리에 초등/중학교가 있었다. 이 집은 놓치기가 너무 아깝다. 연락을 해봤지만 이미 예약자가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너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면서 다른 집을 탐색하고 아직 범수 학교 입학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적당한 집을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는데, 금요일에 다시 연락이 왔다. 해당 예약자가 자금조달에 문제가 있어서 계약을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에게 기회가 왔다! 다음주 수요일에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우리에게 그 집이 오려고 그러는 건가? 그 근처에 40-50km 거리에 아우티스무스 앰뷸란츠(자폐치료센터)가 있는데 마침 또 이사를 안 한 지금 상태에서 범수를 대기 명단에 올려주었다. 수요일에 집을 보고 집이 마음에 들어 예약을 잡고 나면 20분 거리에 있는 조기 치료 센터에도 연락해서 지금 하고 있는 치료들을 바로 이어서 할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 한다. 진짜 되려고 이러나? 이사를 하면 모든 것들을 다 옮겨야 하니까 너무 걱정이 많았는데 뭔가 착착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직은 김칫국 마시는 거지만 그래도 이 좋은 예감에 기분이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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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