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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 첫째, 그 뒤에 가려진 둘째

모질게 굴어 미안해, 내 완벽한 둘째야.

by 팬지

첫째 아이가 자폐 진단을 받던 날, 이상하게도 난 진단을 받은 첫째보다는 둘째가 더 걱정되었다. 우리집 둘째인 범진이는 아주아주 사회성이 좋은 아이이다. 좋은 말로 하면 리더십이 뛰어나고 안 좋게 말하면 오지랖이 넓다. 아직 만 2살밖에 안 됐는데도 그런 싹이 보인다. 나를 닮았다고 생각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첫째인 범수는 아직까지도 엄마를 부르는 일이 별로 없지만 범진이는 수도 없이 나를 불러댄다. 잘 때 내가 옆에 누우면 이유 없이 자꾸 나를 부른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응? 왜? 엄마 왜 불렀어?"

"범진이 엄마 좋아해서 불렀어."

이렇게 애정이 넘치고 감정이 풍부한 범진이를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범진이 같았겠구나.' 범진이는 범수한테도 물론 끝없는 관심과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범수는 관계가 서툰 아이이다. 말 그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범진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받아줄 줄을 모른다. 특히 범진이가 같이 놀고 싶어서 다가가면 범수는 범진이가 방해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며, 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범진이는 더 방해를 한다. 범수가 만든 블록을 무너뜨리고 장난감을 다 던져버리고 게임판 위를 뛰어다니며 다 헤집어 놓는다. 그러면 범수는 '봐, 얘가 방해하는 거 맞잖아.' 이런 표정으로 나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보니 우리 부부는 결국 다 어지르고 방해한 범진이를 혼내게 된다. 그동안은 형아한테 거절당하고 상처받은 범진이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내가 둘째이면서 둘째의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범수보다 말이 통하는 범진이를 다그쳤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일상이 되었다. 부모에게 첫째는 참 특별하다. 처음이기 때문에. 그동안 인생에서 만나 보지 못한 처음이기 때문에.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첫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처음으로 함께 헤쳐 나가다 보니 그 어떤 전우애와 비슷한 감정까지 생긴다. 특히 범수는 말이 늦었고, 말이 트였을 때는 한참 같은 말을 반복했고(지금도 반복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답을 잘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질문도 잘 하지 않는, 말 그대로 대화가 원활하지 않은 아이이다. 그저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에 신기하고 감사할 뿐인 그런 아이이다.

그에 반해 범진이는 애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발달 속도가 빠른 아이이다. 벌써 거의 3살 차이 나는 범수랑 비슷한 수준의 발화를 하는 정도이다. 자기 생각도 잘 표현하고 집중력도 좋아서 혼자 장난감을 잘 갖고 놀기도 하고 끈기도 있어서 잘되지 않는 것도 끝까지 붙잡고 있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아이다. 우리가 범수를 겪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완벽한 친구이다. 사실은, 그래서 범진이에게 너무 고맙다. 범진이를 가질 당시에는 범수가 자폐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범수도 너무 사랑스럽고 좋았으나 나를 닮아 좀 더 살가운 둘째가 있으면 어떨까 싶었고, 범수한테도 그런 친구가 집에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대로 되었고 범수한테는 범진이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소통하고 관계하는 연습을 할 상대가 있으니까 굳이 밖에서 상대를 찾지 않아도 되고, 범진이랑 연습이 잘 되면 자연스럽게 또래 친구도 어쩌면 사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범진이한테는 어떨까? 범진이한테는 범수가 있는 게 좋은 일일까? 이 물음에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범진이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일찍 배울 수 있다는 것, 그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 말고 다른 건 잘 모르겠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자기 자신 하나 감당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일 텐데, 그속에서 범진이는 형한테 지지를 받기보다는 아주 많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시점에서 다시 진단받은 날이 떠오른다. 그냥 엄마의 본능 같은 거였던 것 같다. 이 둘의 엄마인 난 그저 본능적으로 어떤 누구도 필요 없이 혼자서도 잘 생활할 것 같은 범수보다는 사람에게 상처받을 범진이의 마음을 걱정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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