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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소이 Apr 17. 2023

모래성 쌓기

모래성의 임무는 파도에 휩쓸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앞에 앉혀 두고 모래성 잘 쌓는 법에 대해 알려주곤 했다. 물론 너무나 뻔한 방법이었다.


“밑에서부터 단단히 다져야 해. 따뜻한 손으로 꾹 눌러주고 그 위에 축축한 모래를 쌓아. 그리고 여러 번 다져줘. 그렇게 단단한 모래성이 완성되는 거야. 그래야 파도가 와도 한 번에 휩쓸리지 않거든. 두세 번은 버텨줘야 잘 쌓았다 할 수 있지.”


이렇게 끝나면 진부하다 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는 늘 진부한 말을 하고 난 뒤에 당신만의 생각을 덧붙였다.


“명심해야 돼. 그럼에도 모래성의 임무는 힘차게 무너지는 거야.“


이상하게만 들렸다. 파도가 쳐도 두세 번은 버텨줘야 하지만, 또 마지막에는 힘차게 무너져야 하는. 참으로 알쏭달쏭 한 임무였다.


우리는 경험과 학습을 통해 모래성을 짓기 위해 젖은 모래를 쌓아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젖은 모래는 무겁고, 단단하고, 또 쉽게 뭉쳐지기에. 그러나 젖은 모래로 지은 모래성은 수명이 짧다. 바다 옆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쌓아 올려 얕은 파도에는 운 좋게 버텼을지언정, 강한 파도가 오면 곧 휩쓸릴 운명인 셈이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어보고 이런저런 경험을 겪으면서, 조금씩 인내하다 무너져내리는 삶을 알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아마도 ‘숙명’이란 개념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것 중 일부는 개인의 의지와 욕망이 관여할 수 없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


나 역시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걸 인지하면서, 정말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이 사회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다는 것과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차피 무너져야 한다면, 과정이라도 아름답자라는 생각. 혹은 무너진다면 새로운 모래성을 쌓아보자. 커다란 돌멩이를 모래성에 숨겨놓자 따위의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곧 파도에 휩쓸려 갈 것을 알면서도 모래성을 쌓는다. 모래성이 무너지는 그 짧은 찰나에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니까.


공든 탑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 모래성이 무너지며 생긴 빈터에 또 다른 모래성을 쌓을 수 있다는 것, 결과야 어떻든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혹은 무너지는 결과마저 아름답다는 것.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미세입자로 쌓아 올린 지반은 연약하므로 수분을 머금게 되면 지반침하와 산사태가 일어난다는 원리까지!


아버지는 바닷가에 가게 될 때면 모래성 잘 쌓는 법(이하 모래성 잘 무너지는 법)에 대해 몇 번이고 되짚어 줬다. 모래성은 파도에 휩쓸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요즘 들어 느끼는 내 감정을 모래성에 빗대어 생각하게 된다. 가벼운 감정들은 금방 흘러내리기 십상이지만, 무거운 감정들은 그렇지 않다. 요즘 나는 무거운 감정들을 마음 한편에 두고 계속 계속 쌓아 올리고 있다.


누군가가 눈물 나게 보고 싶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상처를 줬을 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와 같이. 축축한 감정들은 엉키고 설켜 커다란 모래성이 되어간다.


그럴 때 명심해야 하는 건, 단 하나. 모래성의 임무는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라고.


파도가 찾아올 때, 마음속에 묵혀둔 모래성을 내어주자. 그렇게 휩쓸려가는 모래성을 바라보며 마음의 짐을 덜어보자.


축축한 것들은 아쉬움 없이 흘려보내야 한다. 이 모든 의미들을 함축하면서 말이다.


비록 파도가 휩쓸고 간 뒤에 젖은 모래들이 남아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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