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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편. 기다리는 겨울밤

기다리는 시간은 멈춘 순간, 끝나지 않을 영원과도 비슷하다.

by 김현이

2년 전, 겨울 한 밤


작은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적막만이 가득한 겨울 밤 이었다. 먼저 지나간 자동차 바퀴 자국에 사뿐히 앉은 눈송이는 검은 두 줄을 희미하게 흐려놓았고 누군가 눈길을 밟고 지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늦은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을 거의 처음으로 밟으며 지나가고 있었는데 자기 발자국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한 걸음씩 조심스러운 걸음을 디뎠다. 혹시 낮 동안 추위에 미리 얼어붙은 길 위에 쌓인 눈길이라면 그 어떤 빙판보다 미끄러울 것이고 만일 낙상이라도 한다면 여자보다는 여자가 안고 있는 두 돌배기 아기에게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가슴으로 아기를 업고 두꺼운 외투는 아이의 등을 덮는 모양으로 입었기 때문에 등줄기에 찬바람의 냉기가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래서 계속 어깨를 움츠렸다. 행여 신발을 신기지 않은 아기 발이 외투 밖으로 빠져나올까봐 양 손으로 아기 발 한쪽씩을 살포시 주먹에 가두고 냉기를 막아주고 있었다.


2년 후, 겨울 한 밤


진눈개비가 아닌 비가 안 섞인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베란다 창으로 눈이 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 방에서 고른 숨으로 달짝지근하고 비릿한 내음에 묻혀 잠든 아이들이 아침에 보일 반응을 상상했다. 눈이란 아이에게는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다 자란 어떤 어른들한테는 상당히 성가신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어느새 감정이 메말라버린 다 자란 어른의 무리에 있으면서 자기 존중감이 없이 별로 건강하지 못하게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엄마는 눈을 보고 몇 시간 뒤의 아침을 걱정하다가 문득 2년 전 그 숱한 겨울밤들을 떠올렸다. 그 날보다 크기가 작은 눈송이가 날리는 겨울 한 밤, 엄마는 온기 가득한 고층의 거실에 홀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혹시 예전 그 여자가 아직도 그 눈 쌓인 밤길을 걷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고 아예 작정하고 베란다로 나가서 고개를 숙이고 여자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아이를 앞으로 업고 외투를 거꾸로 입고 있었던 여자를 볼 수는 없었다.


또 다시 2년 전, 겨울 밤


여자의 품이 갑갑했던 것인지 아기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계속 바꿔가며 불편해 하는 몸짓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 잠시 눈을 피했다. 여자는 계속 불안했다. 여자에게는 업은 아기 말고도 또 다른 어린 자식들이 둘이나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 둘을 텅 빈 집에 재워 놓고 몰래 빠져 나온 이 여자는 왜 모두가 잠든 그 한 밤중에 그것도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맨발로 슬리퍼만 신고서 나온 것일까. 엄마는 아마도 여자에게 정신병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몽유병 앓고 있는 아픈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여자는 둘레를 완전히 한 번 도는 데 20분이 걸리는 길을 그런 모양으로 아주 천천히 걸었고 차가 드나드는 길목에서 나무처럼 눈을 맞고 서서는 낯익은 자동차가 보이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야말로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여자의 머리위에도 눈송이가 눈을 깔기 시작했고 이미 발가락의 후끈한 냉기 일종의 감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는 품에 안고 있는 아기보다는 이제는 텅 빈 집에 있는 두 아이들에게 마음이 더 쏠렸고 이내 결심했다는 듯 이제까지보다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라면 여자가 세 시간 가까이를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쏘다녔다는 말이다.


전화


통화 연결 음이 끝나고 자동응답기가 대답하기를 정확히 스무 번째, 체념하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건너 편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 전화기를 차에 두고 내렸다며 건성으로 미안하다고 말한다. 집 앞이라면서 더는 말할 것이 없다는 투로 전화가 끊어졌다. 술 취한 남자의 목소리, 눈밭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여자는 엄마의 냄새를 맡아야만 잠을 계속하는 막내를 들쳐 업고 집을 나온다. 그리하여 여자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눈이 쏟아지는 길을 걸으면서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렇게 비슷한 날들이 많았던 2년 전의 겨울밤들은 길고도 지루하고도 암담했었다. 결국 겨울은 그렇게 끝났고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는 봄, 여름, 가을이 지나갔다. 하지만 겨울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1년 전, 겨울 밤


여자는 이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지 않았다. 아기는 놀랍도록 빨리 자라는 생명체다. 이제 두 어 시간쯤은 엄마의 냄새 없이도 잠을 유지할 힘이 생긴 것이다. 여자는 1년 전 겨울밤들보다 짧고 빠르게 걷다가 아기들이 잠들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마저도 전과는 달리 아주 가끔씩 그런 기이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1년 만에 돌아온 겨울밤들의 변한 풍경이었다. 그 때보다 덜 춥고 덜 외롭고 덜 무섭고 덜 지루했으면서도 그렇지만 마음은 더 냉정해져만 갔다. 그 냉정했던 겨울밤들이 떠나자 또 다시 봄, 여름, 가을이 왔다.


순수하게 첫 눈이 내리던 지난 겨울 밤.


엄마는 잠든 아이들의 이불 모양을 정리해주고 거실로 나왔다. 엄마는 이제 알고 있다. 더 이상 눈길을 헤매는 정신 나간 여자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아이들이 모두가 따뜻한 방에서 보드랍고 푸근한 이불안에 들어가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번 겨울은 그 전의 겨울보다 덜 춥고 덜 지루하고 덜 차가워지기를 희망하고 용기있게 예감한다. 다만, 엄마는 바란다. 이 겨울밤들이 더 이상은 기다리는 밤들이 되지 말고 서둘러 지나가 주기를, 멈춘 시간의 영원처럼 적막한 겨울밤들이 아니라 이제는 고요한 겨울밤들이 되기를 하고.




2018. 12. 6. 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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