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또 이렇게 도망갈래? 아마도 너의 행동을 누구라도 지켜본다면 조롱하게 될 거야. 네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답답하다고 한숨을 쉬거나 안타까워 할 테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지금의 너의 행동들은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어. 나라도 그런 네게 동정 따위는 갖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너 같이 그렇게 바보처럼 구는 사람은 비난받지 않으면 평생을 그렇게 어둠속에 갇혀서 살게 될 것이 뻔한 일이니까. 그런다고 누가 너를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 이 바보야! 정신 똑바로 차려! 무엇이 잘못된 일이고 무엇이 바른 길인지 똑바로 바라보라고!“
나는 여기에 써진 말보다 몇 배로 심한 모욕과 욕설들로 H를 비난했었다.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무슨 자존심은 그렇게 세고 자존감을 넘어서 그것은 자만이고 오만이라고까지 손가락질했었고 그리고 제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오지랖은 왜 그리 넓은 것이냐면서 화를 내며 오히려 당사자인 H보다 더 흥분하고 자극적인 행동으로 그 감정들을 표출했었다.
나는 H가 심각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건 말도 안 된다면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바보같이 굴 것인지를 따져 물었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무섭게 충고했었다. 세상 누구보다 희생하고 살면서도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단지 살아가는 순간 순간의 소임일 뿐이라고 생각해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삶의 기쁨이라고 여겨왔었기에 받았을 정신적 충격과 피해의식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 H는 그것과는 정 반대의 심리 상태를 보였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그제야 자신의 삶을 비로소 똑바로 보기 시작한 출발이었음에도 심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고 주변사람들에 미안해했다. 그래서 또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은 것 같았고 남몰래 우는 날들도 늘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확인하자 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그렇게 바보처럼 굴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생각도 하지 않게 잠이나 자는 게 낫다면서 심하게 비난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내 마음의 진심을 느낀 것인지 H는 전과 달리 느리고 게을러지고 점점 주변에 무관심해져가는 듯 보였다. 나는 차라리 잘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H에게도 그 정도의 무관심과 나태함은 오히려 지금까지의 치열하고 분주했던 생활에 휴식으로써 좋은 치료제가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이란 온전히 새로 태어나지 않는 한 바뀌기 어려운 것처럼 H는 그 성가신 근성을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쉬고 있어도 맘 편히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있는 모습을 한 번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갔고 벌써 여러 날들이 지나쳐 갔다. 한 번씩 심각하게 침울해지는 모습 외엔 별다른 징후는 없어 보였기에 나도 점점 H에게 신경을 덜 써야겠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왜 울어. 울지 말라니까. 그러면 습관 되서 못써. 너만 손해야. 어디 봐!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니? 내가 보기엔 두통만 더 생겨 보이는데. 왜 두통약을 계속 먹는 거야. 봐! 습관 된다고 말했었잖아. 그만 좀 울어.”
내가 H에게 한 말은 마치 활활 타올라 불꽃이 정점에 오른 장작더미에 대고 이제 좀 뜨거우니 그만 좀 타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들어먹힐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의미한 충고였던 것이다.
H는 또 다시 어둠이 짙은 시간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는 간섭하지 않기도 했다. H가 하는 대로 그냥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H는 제 발소리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게 들리는 정적이 휩싸인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무엇에든 집중할 수가 있었고 또 마음껏 슬퍼해도 방해받지도 않고 들킬 염려로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깊이 잠든 새벽이 시작되기 직전에 깨어있던 적이 있니? 나는 그 시간이 참 좋아. 그 시간이 되면 나보다 훨씬 더 가엾은 존재가 어둠속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내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려주거든. 슬퍼하는 나를 더 가엾은 그 존재에게 위로받는다는 기분이 들면 왠지 죽어가던 희망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속이 조금씩 밝아지거든. 정말로 그 존재를 본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그냥 고개만 가볍게 이렇게 끄덕거리고 말거야. 왜냐하면 사실 그 존재는 언제나 내 뒤로 걸어와서는 절대로 앞으로 얼굴을 드민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그렇다고 내가 상상으로 꾸며낸 존재는 아닌 것은 확실해. 너에게는 내가 하는 말들이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한 밤중에 나를 찾아와 슬픔을 만져주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내 얼굴 앞에 빛나던 작은 불빛 때문에 그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어. 그건 어김없이 언제나 내 뒤로 와서 내 어깨를 감싸주었고 비록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거든. 어둠이라도 결코 이길 수 없는 내 눈 앞의 작은 빛 하나,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나를 위로해주려고 매일매일 찾아왔던 존재는 나의 그림자였어. 하지만 그 정도로 모든 대상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고 생명력을 불어넣어서 위로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테야.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과 생각으로 나를 어떻게 해 보려고 폼 잡는 사람들보다 그림자가 훨씬 더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야.”
나는 H가 하는 말을 새겨듣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H가 책장에서 그동안의 망설임을 과감히 버리고 다시 제인 에어를 뽑아 드는 대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과일 통조림 캔이 떨어지면서 왼쪽 발 가운데 발가락에 떨어졌고 그 덕분에 발톱이 두 조각으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 사고가 난지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발톱을 보면 검게 변한 죽은피가 발톱아래에서 누가 이기는지 보자는 식으로 버티고 있었고 길이가 길어진 발톱 때문에 양말을 신고 벗을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깔끄럽게 삐져나온 발톱을 잘라내다 발톱 아래 죽은피까지 파내버리고 싶은 잔인한 충동을 느끼고 집요하게 죽은피를 파내버렸다. 선홍색 핏물이 둥그렇게 올라오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발가락 사이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실제로 통증의 감각보다는 피가 날 때까지 파내야 직성이 풀린 내 독한 성질에 마음은 더 놀라고 부끄럽게 되었었다. 그렇게 또 다른 삼일이 지나면서 발톱은 잘 아물어 가는데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걷거나 신발을 신는 것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문득 전에 누군가한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네가 나를 언제 네 발톱 밑의 때만큼이라도 여겼니?’
그 때 느끼지 못했던 그때 몰랐던 ‘발톱 밑의 때’라는 말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심한 말인지 새삼 떠올라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게 되었었다. 피가 났어도 걷는 것조차 전혀 지장이 없는데 하물며 발톱 밑의 때만도 못한 존재라니.......
H가 제인 에어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건 어쨌든 좋은 징조이다. 누군가는 제인과 로체스터와의 이야기를 한물간, 흔해 빠진 로맨스라고 치부해버릴지는 모른다. 그러나 H에게는 언제까지나 제인은 고전으로서 살아있고 다가온다. 유행이 지나버린 딴따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현역과도 같은 존재다.
나는 H를 다시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지나버린 일들, 지나온 시간들의 축약체인 그녀의 근성이 어디 쉽게 변하겠는가. 생각해보면 한창때도 그다지 눈에 띄던 인물이 아니었고 이제는 더욱 더 한물 지나서 흔해 빠진 주근깨투성이의 아줌마이고 회사에서는 초년생 때나 인정받고 미래가 촉망되었던 직장인이었다는 것, 이제는 점점 조직 내서도 나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어간다는 것, 그것들이 H 현재의 모습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H를 믿는다. 그 내면을 한 번 더 믿어보고 싶다. 제인처럼 열등감 다분한 외적인 조건들을 갖고 있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설계하여 본연의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싶다.
진흙길을 지나는 마차가 마른땅을 지나갈 때보다 오히려 훨씬 더 깊고 선명하고 뚜렷한 궤적을 남긴다는 것을 나도 알고 H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