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 32편. 그 날들

행정에 신고하는 것 - 긍정을 부정하려는 증명 일 뿐이다.

by 김현이

자동문을 통과하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입구에 서서 공간의 전체를 살폈다.


‘그래, 번호표를 뽑는 것이 순서이구나.’


자동으로 혓바닥을 내비는 신용카드 반만 한 크기의 번호표를 뽑고 또 다시 공간의 전체를 살폈다. 좀 앉아서 쉴만한 곳이 필요했고 바로 4인용 정도의 일체형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로 모르는 사이로 보이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자리의 경계를 어중간하게 차지하고 있어서 팔걸이가 있는 끝에 앉기도 그렇다고 그 둘의 사이를 가르고 가운데를 앉기도 애매한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내 가슴 높이의 서류작성용 탁자에 몸 전체를 기대고 무심코 그 두 사람이 앉은 방향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무언의 시선으로 등을 떠밀어버린 느낌은 들었으나 이내 반가움에 속도를 내어 자리를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두 배로 빨리 행동했다. 팔걸이 쪽으로 몸을 앉히고 가방을 안쪽 내 옆에 바짝 붙여서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뽑은 번호표와 붉은 전자글씨의 숫자를 비교해 보았다. 둘의 차이가 6이 났다. 그리고 천정에 와이어로 매달린 안내표지를 살폈다. 내가 뽑은 번호표는 내게는 쓸모없는 순서요 번호였다. 부동산 거래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번호표이고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내표지를 차례대로 확인했다.


‘나는 3번 창구에 볼 일이 있어서 온 사람이었지.’


이제 막 앉은 자리에 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대기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태한 표정의 행정관 앞으로 걸어가 서류 두 장과 신분증을 내밀었다. 행정관은 잠긴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가다듬더니 처리하는데 10일이 걸린다고 말했고 손에 쥔 번호표를 쭈그려 지저분한 고개를 끄덕이는 휴지통에 버리고나서 들어올 때 통과한 자동문을 똑같이 통과해서 밖으로 나왔다. 바깥의 공간을 살필 필요도 없이 몸무게의 힘으로 주 출입문을 밀고 로비를 빠져 나와서 바람을 맞았다. 앞으론 누구한테든 바람맞을 일은

없겠지.


‘그렇지. 이렇게 삶의 매 순간은 나의 짐작과 상상대로 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눈물이 흘러내릴 줄 알았었지. 그런데 봐. 오히려 나는 몸과 마음이 마치 새장에서 탈출한 새와 같잖아. 홀가분한 이런 기분은 무엇일까. 내가 친한 언니에게 지금 나의 상황을 말하면 내가 아니라 언니가 울음을 터트릴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전혀 울먹이거나 울적한 기분이 아니야. 이런 나의 상태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나는 사람의 관계에서는 꼭 어떠한 전환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원해진 관계, 혹은 불신의 마음이 싹트는 시점에서 그저 아무런 감정의 표출 없이 질질 끌어가면서 눈치를 살폈다가는 그 결말은 결코 좋게 이어질 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보았기 때문이다. 죽이 되었든 밥이 되었든, 한 번은 반드시 터트려야 한다. 뚱보와 리틀맨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 2차 대전 당시 전쟁의 결말이 거의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되어서도 일본은 끝까지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었다. 이 귀엽고도 앙증맞은 이름의 뚱보와 리틀맨이 바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었고 두 도시를 암흑으로 바꿔버린 존재였다는 것을. 만일, 일본이 당시에 어떠한 의사라도 표현했더라면 똥보와 리틀맨은 명명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나는 터트렸다. 그래서 그 자동문을 통과했고 또 되돌아 통과해서 나온 것이다.


진실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인정하며 사는 사람은 만일 그가 혹은 그녀가 어떤 사실에 대해 남다른 신념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언제나 사실의 결과에 대해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며 대체로는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만 그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찾아내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그동안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 쪽에 속해 있었다. 만일에 현실 상황에서 믿기 어려운 결과가 엄연한 사실로 나타날 경우에도 이와 같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부정할 수 없다는 태도로 수용해 버리고 만다. 더는 골치 아프게 생각하기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점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그녀 쪽에 속한다. 그저 처음부터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소극적이라서 보다는 더 나쁜 결말을 막아보고자 하려는 참을성과 인내심 때문인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런 나를 악독하고 지독하다고 피도 눈물도 없다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이 제 각기 존재하는 것처럼.


행정관이 취급하는 서류는 어떤 사실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출생 신고가 사망신고서를 내기 위한 절차적인 신고로 여겨질 수 있는 것 처럼. 10년 전, 사실을 인정하는 신고서를 내던 그 날도 나는 혼자서 행정관을 찾아갔었고 10년 후, 반대의 사실을 인정하는 신고서를 내던 그 날도 혼자서 행정관을 찾아갔다. 10년 전 그 때는 아버지께 전화를 드릴 수 있었지만 10년 후 그 날은 차마 전화는 드릴 수 없었다는 것이 나에게 그 날의 분위기를 대변하지만 아버지는 10년 전 그날도 내가 신고서를 냈다는 말에 여전히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알았다.’ 라는 말 외엔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았었다. 지금 나는 그 날도, 후의 그 날도 아버지의 기분은 비슷했다는 것을 알 것 같다.


타인에게 침범당하지 않을 단단한 내면을 갖기 위해서는 나만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세상에 대해, 미래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이기 보다는 비관적 현실을 자각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건강하고 건전한 태도로서 살아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삶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이 끊임없이 바뀌듯 꿈도 함께 변해가면서 완벽한 만족을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다면 변해가는 현실 앞에서도 굳건하게 전진할 수 있다. 그런 무기를 가진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아닌 것을 냉정하고 차갑게 잘라낼 수 있는 용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경험과 노력을 통해 지혜로써 완성해 나가야 한다. 누구에게나 쉬운 것, 그것은 결코 미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헤픈 것이 되고 만다.


여전히 좀 오래까지는 힘들 것, 괴로울 것, 방황할 것, 그리고 슬퍼할 것을 알고 있으며 짐작한다. 나는 이것이 내 생의 무수한 삶의 방문 한 개를 열었을 뿐이고 비록 어둡고 축축해서 지나가는 것이 다소 불쾌하게 느껴지더라도 곧 열고 들어갈 또 다른 방문이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


2019. 1. 8. 화.

<끝>.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