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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편. 사랑의 유지

그 비결은 거리의 간격을 지켜가는 것

by 김현이

지난 11월 마지막 주말


빗속에 눈발이 섞인 것인지 눈발에 빗방울이 섞인 것인지 분간해 낼 수 없는 정도로 질퍽한 날씨, 나는 기분이 제법 들뜬 세 아이들을 차례대로 차에 태우고 장거리 운행을 위한 대비로 안전벨트를 채웠다. 세 녀석의 출발 준비가 끝나고 1년 내내 식탁에서 내려온 적 없는 김치가 담겼던 통들을 트렁크에 가지런히 싣고 드디어 내 몸을 운전석에 장착했다. 이제 가속 폐달을 밟으면 출발이었다. 속도를 줄이는 일 없이 100Km/h로 달린다고 해도 두 시간을 꼬박 가야 하는 거리에 나의 고향 집, 나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김장시즌과 주말, 그리고 이 성가시게 질퍽한 날씨까지 겹쳤으니 분명히 고속도로는 차들로 들어차 있을 것이 분명했고 매년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여유롭게 시간을 예정하고 점심쯤 도착할 수 있도록 맞추려고 아침 준비를 서둘렀었다. 후끈한 히터바람에 세 아이는 노곤해진 몸을 참아내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큰 녀석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는 것이 고개를 이지기 못할 정도로 잠이 푹 든 모양이었다.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내리는 눈 속에는 빗물이 점점 줄어들어 집까지 다다랐을 때는 진눈개비가 아닌 눈송이가 가볍고 조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예상보다 시간을 아껴서 도착할 수가 있었다.


고향 집의 김장 풍경은 언제나 활기가 넘쳐난다. 북적거리는 이웃 아주머니들, 모처럼 만나는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은 부모님은 그 날의 훨씬 이전부터 분주하시다. 텃밭 닭장에서 그동안 오동통하게 살집이 붙은 토종닭을 여섯 마리나 잡으셨다고 했다. 도착하니 이미 마당 앞에 걸린 가마솥에는 뽀얀 증기가 하늘의 눈길을 가르며 퐁 퐁 퐁 올라가고 있었고 꼬마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황빛의 불꽃이 피어나는 장작더미에 작은 손바닥을 보여주면서 곁불을 쬐었다.


'이 가마솥 안에 들어앉아서 열을 받을 대로 받고 잔뜩 억울한 토종닭 놈들을 우리 꼬마들이 열 손가락을 다 써서 뜯어먹겠구나.’ 생각하니 제일 먼저 큰 녀석의 먹는 모습이 그려졌다. 워낙에 무슨 음식이라도 야무지게 잘 먹는 녀석이라 그런 것 같았다.


올 사람들이 다 오고 시간은 점점 밤으로 깊어져 가는데 아빠는 내가 아이들을 잠옷으로 갈아입히는 방으로 들어오셨다. 약주를 드셨으니 취기도 있으셨고 모처럼 온 가족이 다 모였으니 기분도 한참이나 좋았을 그 때, 아빠는 오빠가 가까운데 살고 있어서 정말로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오빠가 부모님 근처에 살면서 수시로 부모님을 만나고 함께 식사도 하고 조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자주 만나면서 더 많은 정들을 쌓아가며 살고 있는 것을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 부모님의 하나 뿐인 며느리, 나에게는 새언니가 참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냥 무던하고 착실하고 소박한 우리 새언니가 참 고마웠다. 그리고 이건 또 다른 말이지만, 엄마가 나의 사정을 언니에게 이야기 했을 때 언니의 한 마디가 쉽게 잊혀 질 것 같지 않다. ‘요즘 세상에 막내 아가씨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 말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갈등하게 만들었던 이미 내린 선택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로 내 양심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게 하는 위로의 말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바퀴가 주저앉을 정도로 많은 것을 싸왔다. 아이들과 내 마음속에도 애틋함과 정겨움,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잊고 지내던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푸근해졌고 그러고 나서 항상 마음속 다짐으로 끝나게 되는 ‘자주 와야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아빠의 그 말, ‘가깝게 살아서 참 좋다.’는 이야기가 계속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래, 어쩌면 사랑을 지켜내는 비결은 간격을 유지하는 힘에 있는 것인지도 몰라.’


한 달이 지나가고


크리스마스가 왔다. 아이들이 무척 기대했고 나도 기대했던 그 크리스마스가 왔고 또 어김없이 지나갔다. 나는 아이들이 외롭지 않고 소외된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 주려고 어떤 해 보다 노력하기는 했었지만 어쩐지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브가 지나고 한가로운 휴일을 보내고 있는데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어왔다. 이웃집 언니, - 언젠가는 꼭 내가 아는 이 분의 이야기를 꼭 쓰겠다는 생각을 품게 한 사람, 나의 부족함을 보여줘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을 사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사람 – 였다. ‘응, 선물이 많이 들어와서 좀 나누려고.’ 나는 언니의 말에서 단번에 우리를 배려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안다. 언니도 세 아이들의 엄마이고 매일매일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고 우리 이웃의 대부분들처럼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누리면서 살지는 못한다는 걸, 나와 아이들은 대단한 선물을 받은 기분인데도 정작 자신은 드러내고 싶지 않고 과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겸양이 있다는 것을 안다. 길지 않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잠시 가라앉았던 마음에 고마움이 번져갔고 마음은 즐거워졌다. 그렇게 아이들과 나의 크리스마스가 정리되고 있을 무렵,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화면을 확인한 아이는 ‘아저씨다.’하고 ‘누구세요?’ 물을 것도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옆집에 사시는 부부시다. 아주머니는 포장한 선물 박스를 얼핏 보아도 서너 개를 포개어 들고 계시고 아저씨는 단우가 특히 좋아하는 거라고 하시면서 아이 주먹만 한 딸기가 든 커다란 박스를 들고 서 계셨다. 나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큰 아이들은 옆 집 아저씨께 선물로 받은 보드게임을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막내는 이웃 집 이모한테 받은 자동차를 조종했다가 아니면 아저씨가 주신 로봇을 자동차로 변신시켜 보았다가 공룡을 로봇으로 변신시켜가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엄마와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밤은 이렇게 깊어만 갔다.


또 다시 다른 날이 시작되었다. 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큰 아이가 말한다.


“엄마! 옆집에 보답을 해야 될 것 같아요. 그 분들은 고기를 좋아하시니까 엄마가 고기로 보답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그래, 얘들아! 엄마도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도 마냥 언제까지나 이 집에서는 살 수 없는데 너희들 학교 문제도 있고....... 이사를 간다면 어디에 가서도 이런 이웃 분들은 못 만 날 것 같은데 어쩌지? 우리 그냥 이 집에서 계속 살까?”


입을 다물고 있던 둘째, 막내도 이구동성으로 합창을 한다.


“응! 좋아 엄마. 우리 이사 가지 말자.”


아이들을 모두 내려주고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문득 지난 번 아빠가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너희 오빠가 가깝게 사니 정말 좋구나.’


‘엄마와 세 꼬마들의 다정하고 따뜻한 이웃들 – 이렇게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는데 정말로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거야. 특히, 한 지붕에 사는 부부와 아이들 사이라면 더 없이 중요한 문제일거야.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언제라도 곁에 있어주어야 하는 일종의 의무를 지켜가는 것, 개인적인 일을 사소함으로 인정하고 포기해 버릴 수 있는 배짱, 그 배짱이 한 지붕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여유이고 마음이고 힘이겠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2018. 12. 26. 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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