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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1. 2020

제 8 장

71. 이별은 기다림의 시작    


그대, 지난 일로 생각나는 사람 아니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대는 나에게

새롭게 찾아오는 사람이에요    

그대 만났을 때 그때

그대 떠나올 때 그때

그대 나 없는 지금 이때    

떠나온 그 날을 반으로 접은 듯

두 시간의 공간은 차곡하게 겹쳐

모든 것이 시작처럼 다가와요    

혼자여도 함께 있는 듯 

지난날 함께한 그때로 돌아가요    

봄이 되면 그대는 밤하늘 목동이 되어

나를 찾아 밝은 빛으로 쓰다듬어주고    

여름이면 우아한 백조의 날갯짓

그 품에 안기어서 날았어요    

가을 오면 비단 비늘 옷으로

부드러운 살결에 덮어주었죠    

겨울이 왔을 때는 시간을 모래로 만들어

빛나는 오리온 별빛을 함께 기다렸어요    

그랬던 그대는 지금 나에겐 없어요

하지만 계절은 가버리면 또 와요

기다리기만 한다면 금방 돌아와요    

그대에게 난 항상 지난 사람인가요?

나는 그대라고 한다면 늘 지금뿐

나에게 그대와의 이별은

멈춰진 시간, 그러니까 항상 지금이에요    


덧붙임 : 우리나라 계절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철마다 가장 빛나는 별자리를 생각해 보면서 적었다. 봄밤에는 목동이 처녀자리 더 빛나게 하고, 여름밤 백조가 우아한 빛으로 하늘 가득 채우면 가을 올 때 물고기들 함께 저절로 찾아오고, 겨울 오면 모래시계 닮은 오리온자리 보면서 다시 봄밤 기다리는 내 모습 그려보았다.


72. 사랑하면 안 돼요   

 

나 지금, 그대 하려는 말 알아요

눈치 없다고 말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그대, 눈부터 말했잖아요    

너무 밝은 날은 피해 주세요

나도 그런 날에 그대 그런 말

잘 들을 자신 없어요

기뻐서 미소라도 지으면 안 되니까요    

또, 너무 곧 대로 말하지도 말아요

그런 말은 애모 모호한 말로 해야

감각적으로 들리지 않아 안 흔들려요    

그런다고 너무 깜깜한 밤도 싫어요

어둠은 그대 모습 못 보게 가리고

오로지 내 감정에만 빠지게 하니까

감추고 싶은 내 기쁨의 표정

나보다 그대 먼저 눈치 챌 수 있으니까요    

나도 사실은 준비는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하려 들면 겁이 나요    

언제나 출발이 끝을 예감하듯

시작이란 이별을 암시하는 것

소금이 달지 않은 걸 알아요    

내 인생 지금, 그 언제보다 단단해요

그러니까 그 언제보다 잘할 수 있어요

이미 아는 걸 억지로 의심하는 건 바보죠    

그러니까 누구도 나를 사랑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그대, 지금 하려는 말 참아요  

  

덧붙임 : 첫날은 시작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어떤 날보다 잘 지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끝으로 갈수록 그 마음이 희미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늘 첫날엔 누구나 대부분 각오를 달리한다. 난 좀 항상 비슷한 사람이라 오히려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가 밀려와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성실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늘 같다.            

73. 나비    


빗속에서 날지 않던 너를 보았었다

하늘로 곧추세운 제 날개 업고서

굳어진 듯 말라 빗속에 앉았는지

그 모습마저 도도하여 내 발길 붙잡혔다    

잿빛 옷 안에 제 빛 감추고 있어서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나보다

눈이 멀었는지, 말문이 막힌 것인지

지난 봄 나를 희롱하던 몸짓도

가까이 오면 가버린다는 경고도 없었다    

나는 네가 두려워한단 걸 알고 있다    

줄 끊어져 거침없이 나는 잠수종같이

빗속 날갯짓이 없는 건 오늘따라 서글프다    

그날 나는, 네가 감춘 네 빛을 보았었다

때론 지나친 아름다움이 슬픔을 주듯

오므린 날개 안쪽에 감춘 너의 빛이

얼마나 안타까운 아름다움인지 알았다    

그런 너도 내게 그랬다

나비처럼 와서 기쁨보다 마음 더 아팠다    

내 마음 날갯짓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를 날아간 너에게 나는

너무 깊이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나도 내 안이 어디까지 깊은 줄 몰라

너 있는 곳 못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시인이 된 헤세는 너 때문에

품위를 잃어버린 적 많았다고 했었다

너는 쌀쌀맞은 아가씨처럼 

내 앞에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끝내 만지지는 못하게 하는구나    

그건 내게 준 주의와 같은 것

내 몸 꽃가루에 두 눈 둔해져도

나는 몰라요, 나는 아니에요 할 테니까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

빗속에서 가만있는 너를 만났다는 걸

너는 그렇게 경고한 것일 테지

핏빛의 날갯짓으로 단 한번 만에 

나를 너의 것으로 할 수 있었단 걸    

가만있던 네게도 첫눈에 반했던 나

그런 네가 내 한숨 쉴 때 그 길 찾기를

그래서 도망쳐나가길 내내 바라면서도

나는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숨 참았다    

나는 슬픔이 있다고 미리 말했었다

너는 슬픔 때문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라 죽어도 먼저는

말 못하고 바라보기만 할 줄 알고 있었다    


덧붙임 : 먼지처럼 빗물이 흩어져 날던 날, 나는 잿빛 날개 나비 한 마리가 비를 맞는 걸 보았었다. 내 걸음에 날갯짓 단 한 번, 그 안에 감춘 매력적인 붉은 빛이 인상적이어서 이렇게 문득 한 번씩 떠오르고, 또 어찌하여 그 습한 곳에서 날개를 적시고 있었나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워질 때 있다.                                                                                        

74. 해바라기    


폭풍 가고 난 뒤 기어이 새벽 오면

나는 태연한 하늘 보게 될 줄 알았다

너 괜찮은지 밤새 걱정한 내 마음

부지런한 걸음 네 앞에 먼저 섰다    

넌 그대로구나! 

고맙다 먼저 말해주고 미소 지었다

네 옆 변덕스러운 어여쁜 꽃들은

모두가 쓰려져 모습마저 없어지고

오직 너만 그대로 서 있구나    

그래, 그 맑았던 한 낮

무섭게 부서지던 해도 피하지 않았지

눈 부실 법 한데 한번을 깜박이지 않고

고개 아플 법도 한데 단 한번 떨구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도한 해는 너만 보는 게 아닐 텐데

너는 한번을 고개도 안 돌리고

하루 종일 해만 따라가는 걸 보았었지    

오늘 아침, 어쩐지 다르다

그래, 지칠 줄도 알아야지

한번은 고갯짓이라도 보여야

너 참 고맙다 할 줄 알겠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곧은 네가 아프다

그러려고 두 다리 얼마나 힘주었는지

쓰러지지 않으려고 견딘 고통 나는 안다    

그렇지, 참은 거야 

폭풍을 견뎌야 다시 해를 볼 것이니    

한낮 눈부심도, 한밤 폭풍도

해를 감당하려면, 폭풍에 맞서려면

견뎌야지 했으면 참을 줄 알아야지    

그래서 나는 너를 믿었다 

지난밤 내내 걱정했으면서도

그러면서 나도 같이 참았다

그 사람 바라보기라도 하려면

나도 참을 수밖엔 없었다    

너, 해바라기처럼 참아야지

그토록 기대하는 그 한 마디에

마음 조급해하지 않아야지  

  

덧붙임 : 동이 터도 해는 안 보였다. 해를 보기가 어려운 날들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해마저 선뜻 양보하니 더 신난 건 먹구름뿐 인가보다.                                                                                                                                         

75. 장맛비    


이렇게 오래 울고 있는 건

대단한 슬픈 일 있었다는 것

나는 물어볼 자신도 없으면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마 오래 참은 거겠지

그렇게 울기만 할 수는 없거늘

얼마나 큰 아픔이 너의 마음 건드렸기에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우는지

너에게 한마디 말도 못했다    

서툰 나의 말이 너를 더 울릴까 봐서

난 그냥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언제였던가

그리 오래전은 아니니 나도 생생하다

너처럼 이렇게 울어본 적 있었지    

눈물이 난다는 것, 그래서 우는 것

그건 순전한 진실 탓이란 걸 잘 안다

운다는 건 진심을 드러내는 방식

오죽하면 못 참고 울까

그 서러운 간절함을 나는 안다    

너 울면 속도 까맣게 타겠지만

너 울고 지나간 이 길은

더없이 검게 번들거린다    

언제는 그치게 되겠지

다 울면, 그 울음 그치고 나면

하늘에 반짝이는 점 박히겠지

눈 한번 깜박이면 빛나는 별 되겠지    

나 수도 없이 울어보았지만

너처럼 이렇게 오래는 아니었다

돌아보니, 내 마음 

온전히 순수하지 않았나 보다

못 그치는 널 보니 자꾸 그런 생각 든다    

나 울 때 떠올리던 사념들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너도 이제 그 진심 내 던지고

이 슬픔에서 자유롭기를    

슬픔이 이다음 즐거움 될 거란 뻔한 말

들을 땐 믿고 싶어 의심했지만

지금은 안중에 두지도 않는다    

기쁨 넘쳐흐르지 않더라도 좋으니

제발 너는 그 눈물 멈추기를

   

덧붙임 : 겨우 반나절 반쪽짜리 하늘만 보이더니 여지없이 밤새 비가 내리고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는 천둥 번개까지 요란한 모양이지만 모두가 바라고 있는 것처럼 이제, 그만 좀 내렸으면 좋겠다.                                                                                                                

76. 이별이란 더하고 빼는 것    


나는 오늘도 그렇게 그려요

어제처럼 그리고 그리죠

내일도 그럴 거라 하시겠지만

이제 나는 그러지 않아요

더 이상 동그라미 그리지 않아요    

달력의 숫자는 커졌다가 작아져도

그려진 동그라미 숫자는 늘어만 갔죠

동그라미 안에 쓴 숫자 커진다는 건

모난 내 마음 그 따라 둥글어진다는 것

그리면 그릴수록, 오리면 오려낼수록

그리움 늘어난 건 설명 어렵지만

그 모양 점점 더 둥글어진다는 건

나도 따라 그것이 쉬워지는 일이겠죠    

그릴수록 그립고

오릴수록 채워지는 내 마음

그릴 때마다 지우고 비워내기 더했어요

아! 함께 밀려간 건 미련이구나     

안녕, 안녕!

이 말엔 동그라미 많아 쓰는 것 쉬워요

그러니까 말로 하는 건 하나도 힘 안 드는 일

그것은 이제 내게 무척 쉬운 것이죠    

동그라미 그리면서 더 망설이지 않는 건

숫자 커진 대신 나는 작아졌다는 것

마음 빼기로 점점 사라져 버렸다는 것

결국, 텅 빈 속만 남았다는 것    

그걸 허공에 외치니 메아리도 못 되는구나

돌아오기 바란 건 아니라고 해도

떠나버리라고 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오기로 더 멀리 밀어냈어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메아리 되라고    


덧붙임 : 느낀다는 것,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봐야지 생각하고 그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의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 그 정서에 내리는 가장 기본적인 명령은 바로 ‘느낄 줄 알아라’ 하는 것이다.



77. 밤을 바라는 것    


새벽도 안 된 시간에 눈 떠지면

나는 생각했었다

바라면 안 되는 것들부터    

드문드문 꺼져가기 시작한 밤별도

지칠 때 되었으므로 

더 자주 반짝이길 바라지 않았었다    

한숨도 쉴 이유도 안 되니

아직 한밤중인 작은방으로 돌아와

벽에 바짝 붙어있던 작은 전구

짧은 전선꽂이에 맞추면

등 돌릴 때 마지막으로 바라본 별

싹 다 잊히도록 시간을 흩트려 놓았다

방안에 잠자는 어둠 서둘러 깨워

멀리 쫓아낸 것은 아니지만

눈이 부시다는 건

아무리 눈치 없어도 스스로 떠날때란걸

나는 그 전구조차 못마땅해서

조금만 더 어둡기를 바랐었다    

눈치 볼 것도 보여줄 이유 없는

노트 펴고 나는 썼다

바라면 안 되는 것들을    

그녀는 죽어도 연인밖에는 될 수 없고

설령 이루어도 바란 만큼의 기쁨을

그 이룬 대가로 바쳐야 한단 걸 알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지금 간절함 바라지 않아도 

저절로 와 준다 하여도 

나는 한번 죽으면 

죽어도 다시 태어날 마음 없었다    

차라리 언덕의 먼지 낀 초록풀이 되어

나를 밟고 내달리는 말 탄 젊은 기사의

용맹함을 존경하면서 사는 게 나리라    

여전히 햇살이 노니는 한 때, 오후

해는 이미 키 높은 아파트 뒤로 넘어갔지만

아직 저녁이 온 것은 아니었다

하루 중 여기까지 왔다는 것

내가 안식의 글을 아무리 쓴다 하여도

양심으로부터 도망쳐 볼 수 있었다    

나는 참고 있던 걸 쓰기 시작했다

내가 바랄 수 있는 것들을    

오로지 이름만으로도 두근대는 내 마음

정작 그 이름 주인은 내 이름 모른다 하여도

그대 잠들 때 그 낮 스쳐갈 때 내 향기로 

엷은 미소만 짓는다 해도 참 좋겠다    

그리하여,

내 소망은 사소함을

내 정신은 진부한 것부터

그리고 내 새벽은 낮 없는 한밤중을

먼저 바라게 되는가    


덧붙임 : 어둠의 가장 놀라운 힘은 우리의 시선을 장식하는 온갖 것들을 송두리째 녹여버리고 하나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  

                                                                              

78. 입추    


나 이제, 그만 적셔요

여름인 줄 뻔한데

싱싱한 나뭇잎, 풀잎들

마냥 통통하게 살만 찌우고

고개도 못 들어 생채기도 못 내요    

나는 몰라라 하실 건가요

이대로 불사르면

마르지도 타지도 못해

그냥 더러운 푸릇함만 안고

겨울과 재회할지도 몰라요    

이제 나 그대 타는 볕으로

날씬하게 말려줘요

그럼 그동안 무심함 잊고

못이기는 척 껴안을게요

가을은 가을답게 나고 싶어요                                                                                            

79. 오해    


그대는 귀부터 안 들리나 봐요

나 고백했는데, 그대 그저

웃기만 하니 그런가 봐요    

사실 고백하기 전 나도 그랬어요

힘겨운 내 운명을 한탄하듯

소리 내어 울고 싶다 그랬어요.    

하지만 고백은 저지른 과거

단 한 순간이라도 돌려받지 못하죠

과거니까 다행이에요

고백 끝에 웃으며 '안녕'했을 때

그제서야 그대 웃었으니까요    

그 웃음의 의미, 나에게 

'안녕'을 말하게 해도 

고백한 걸 후회하지는 않겠어요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

나는 눈부터 보이지 않았어요

그대 '사랑 한다' 말하던 날은

수줍음은 내게 없었어요

그 자리에서 입맞춤 답하려고 했었죠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할 수 없었어요

당신 사랑을 말할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얼마나 그 얼굴 붉어 두근대는지

볼 수 없어 차마 울지 못해 웃었어요    

웃어도 당신 나를 알아준다 여긴 거죠    

하지만 당신, 나를 오해했군요

사랑했던 마음 상처로 아프니 

춥고 무섭게 변해야 당연하죠    

미안하군요 

그러니까 내 원망은 당신과 상관없고

순수한 욕망은 한낱 이성으로 가득차고

이제 내가 내 신세를 완전히 받아들였어요    

나는 당신께 고백 받은 사람이니까

슬퍼지면 미소 짓고 기뻐지면 울죠

다만 시간은 변해도 언제나 그대로

익숙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뒤 늦게라도 '당신! 사랑했죠' 한다는 건

사랑의 오해만큼 눈물을 자극하는 일    

난 이제 귀머거리 되니 그렇게 인사하죠    

당신! 이제부턴 더 잘 지내요    


덧붙임 : 얼마 만에 밤중에 비가 오지 않았나, 기억도 없다. 오늘 낮도 그러하길, 그래서 습한 공기 싹 말릴 수 있도록, 큰 창도 활짝 열어놓고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되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툭하면 울게 되는 내 마음도 같이 마르게 되면 좋겠다.                                                                                                            

80. 편지    


허공에다 편지 날려 보낸다

어차피 나 혼자만 알고 보이는 것

선명한 눈물 자국, 두 눈 울어도

이 순간 작은 들풀 고개 들 정도로 어여쁘다    

죽어도 없어요 사랑할 마음은

그러니 묻는 사람 없어도 웃게 되고

생각할 시간도 없이 눈물 흘렀다    

꽃 편지 날려 보내니 허공은 꿈 같다

어딘지도 모르는데 너는 삼켜버렸다

그 모습 소멸하여 오직 혼만 날리네    

언제난 그러하듯

공기는 지나치게 섬세하고

한 순간 눈멀도록 우아하지    

꽃 편지에 손 흔들 작별도 들어주지 않고

절묘하게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공기는 그대와 같은 것

나를 빈틈없이 껴안았는데도

숨 쉬는 게 어렵지 않았고

내 안에 마음껏 들어왔으면서도

동요도 없이 평온한 걸 보면서

더울 땐 냉정한 그대 같아야지

추울 땐 더운 그대 같아야지

변한 건 편한 대로 모양만 바뀐 진실

허공은 완전한 그대이다    

처음부터 줄 생각도 없던 꽃편지

잊는다고 날려 보낸 것이

오히려 그대에게 읽어준게 되었다    

아! 

쓴 편지는 꽃잎같이 흩날리고

눈 깜박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

눈 감아도 향기로운 그대 같구나    

언제라도 돌아오면 거기가 바로 제자리

사소한 눈빛도 전부 받아주겠다    

덧붙임 : 공기에 대해 더 높은 가치를 매길 수 있다면 잡히지 않는 덧없는 형체와 아무리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허무함 때문이다. 그건 좀처럼 마음을 알 수 없는 연인과도 닮았다.                                                                                                                                                    

81. 거짓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오는 달은

멀쩡하게 해가 뜬 날에는 몸을 감추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던 달은

낮 하늘가 아주 작은 흰 구름 조각처럼

버젓이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없어졌다    

나 하나쯤은 눈감고도 속일 수 있다

알아도 속아 넘어올 걸 알던 그대 같았다    

그런 눈속임 아이라도 부끄러운 줄 알고

제아무리 구름인 척 해봐도 

한 방울 비로도 못 내리는 완전 가짜였다    

어쩌면 그건 거짓말

나도 따라 하기라도 해 보려면

구름처럼 덧없이 멀어질 진심 알아도

자꾸만 진짜인지 확인하려드는 건

그대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건 처음부터 거짓말    

그대는 내가 그립다고 말만 했지만

나는 혼자 있어도 그대 함께 있다 여긴 건

그 거짓말의 진심,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지킬 마음도 없는 약속만 했어도

나는 그 말들이 그냥 해본 걸 알아도

마음 들떠 아이처럼 잠못이루었다    

이제와 다 믿었다고 말하면 속이는 것

나는 더 이상 흔들릴 이유 없다 하는 것

할 수 있는 거짓말의 끝까지 했다는 걸    

들풀 향기 싸한 걸 자세히 보니

이제 막 할퀴고 간 자국 보이고

거짓말은 한 번만 해도 아프구나

잘려간 풀잎은 더 흔들리지 못하더라도

독한 내음만 으로 얼마나 아픈지 

거짓말만 하던 그대가 내 마음 아리게 했다    

이제 이 이해하기 힘든 여름도 가고나면

나는 순전히 진심만을 말했다

뻔뻔한 밝은 달로 나타나겠지    

그대 그 모습 아무리 억울해도

사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해야 겠다    

나 아직도 그대를 사랑하죠    

나는 베인 들풀 길가에서 꼼짝없이

다른 사람 앞서 지나가길 한참을 서 있었다

   

덧붙임 :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아도 진실로 알고 싶은 거라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것.                                                                                                                    

82. 어느 여름날 포도밭 가에서    


낮은 울타리에 가시철사 두르고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경계하며

"죽을 각오라면 어디 한번 먹어 봐요"

달콤한 향내로 행인 시선 붙잡고

이렇게 유혹하는 것 같다    

검은 보랏빛은 죽음이라도 암시하듯

하얀 독가루를 온 몸에 칠한 채

한데 엉겨 붙어 제 몸 돋보이려 부풀리는

이것은 정말로 딱 한개만 따 먹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든다    

지나가는 사람들에 혹시 상할까

지키려는 그 마음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그 포도밭 주인의 마음 잘 안다    

조개속살에 살면서 빛을 감춘 진주

석탄바위에 숨은 깎이지 않은 다이아몬드

그녀가 얼마나 매력있는지 아는 그 사람은

빛처럼 빛나는 보석의 아름다움에

행여 뭇 사람들 시선을 다 받을까봐서

마음 졸이며 혼자만 알고 있기를 바라는 건

포도송이에 석회가루 뿌리는 마음같은것    

그 사람은 그녀를 혼자만 알길 바랐다    

나도 그 사람 그 마음 이기적이다 비난 못했다    

별이 무수한 별똥별로 떨어지는 건

밤별이 우는 것임을 안다면

차마 아름답다고 미소만 짓지는 않겠지

슬픔 때문에 울 때도 있다는 건

지금 이 글에서 생각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    

손 탈까 혼자만 알고 싶은 그 사람 마음이

꼭 수확철 포도밭 주인 같은 마음이란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덧붙임 :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보면 포도 수확 철이 되면 낮은 담장에 가시덤불 쌓고 약으로 오해할 만한 석회가루를 일부러 포도송이에 뿌려 놓는다는 내용이 있다. 아이가 커다란 포도 알을 따 입속에 넣고 깨물지는 않고 알사탕처럼 장난만 치는 모습이 떠올라 문득 웃음이 났다.                                                                                                                                                             

진실과 오해    

혹시 바라던 마음은 자책하지 못하고

텅 빈 기차역 플랫폼에 홀로 선 나는

유리로 된 출입문에 비친 나를 두고

원망스러운 너를 비난하고 싶었다    

무거워진 발걸음 아무 벤치나 앉아

그 옆 키 작은 난국 한 송이 꺾었다

노란 꽃잎 한 장, 한 장 떼 내면

너도 내게서 잘려나가는 것이다    

다 떨어진 꽃잎은 때마침 급행열차

바쁘게 따라붙던 바람 따라 흩어졌다    

그렇지!

언제나 성급한 소원은 실망을 부르는 법    

그러고 보니 너는 약속을 하는 척만 했었다

하지만 진심은 교묘하게 말만 바꾸면서

무수한 표현에 내 마음 속아 넘어가

이제 와서 되도록 말을 참는다는 것 또한

네 말 전부다 믿었다고 인정하는 바보    

나는 생각도 없이 앉은 벤치에서 생각한다

네 말을 나같이 잘 듣던 사람 또 있을까

나는 잘 듣는 사람이라 뭐든 마음에 새겼다    

아! 그래

너는 다른 사람 말을 잘 듣던 사람이었구나    

너를 나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 또 있을까

그건 너 있는 지금 거기 어디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유였다    

잠들기 직전까지 네 생각을 했고

언제라도 눈 뜨면 네 생각부터 났다    

하지만 기쁨보다 슬픔을 먼저 느낀 건

네 생각을 지워야지 그 생각부터 한 이유였다    

생각도 의지대로 된다면 넌 이미 타인    

쏟아지는 볕 아래 앉아 있어보니 알 것 같다

햇살은 불타는 빗물과 같아도 내 몸 닿아봤자

굳은 심장에 조금의 열도 전하지 못한다는 걸    

지난날엔 나는 너라면 그랬었다

한 여름 열병에 걸려 손톱마저 얼어붙어도

가슴은 달아올라 견뎌내지 못했었다    

언제라도 네가 비슷하게 나타나면

항상 그 때 같다 전부 잊은 줄 알던 너는

구멍 난 내 깊은 곳에 고여 있었던 것 뿐

하필이면 죽어야 사라질 곳이라서

차마 또 비슷한 슬픔으로 울게 될까

속 으로만 되내인다    

너를 사랑한다고    

굽은 길 돌아오는 기차가 눈에 들어오니

나는 생각 없이 앉았던 벤치에서 일어섰다    

덧붙임 : 마치 서로 약속한 것이라고 믿던 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던 날에 나는 누구 원망보다는 거의 언제나 아무 일도 아니라고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아야지 하며 내 진심을 숨겼던 때가 생각난다. 나도 내 마음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도 없으면서 누가 내 마음 인정하길 바랐다는 것이 부끄럽다.                                                                    

짝사랑    

부딪히기 직전까지 떨어질 때는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모르지만

목소리 무수한 비명 속에 숨고

산산이 부서지던 방울들에

맨 종아리 흠씬 맞으면

어느새 온 몸은 너로 젖어 있었다    

그렇게 적시고 나면은

성미 급한 비구름은 거만하게 

웃으면서 돌아섰는데

내 몸은 뜨겁던 볕아래에서도

한참을 마를 줄을 몰랐다    

축축한 나무 벤치에 앉아서

그렇게 원하던 너를 보고 있어도

조금도 울적한 기분 나아지지 않고

곧 바짝 마를 거야 여겼던 뜻

포기하고 떠났다    

너는 빨리도 변해가는 소나기 같고

한두 번은 다정하면서도 쉽게 냉정해

짝사랑 그대 같으며

기다림에 지친 슬픈 영혼 같았다    

그대는 아무리 다정해도 성난 비구름같이

언제 한꺼번에 빗물 쏟아낼 지 몰라서

내 마음 불안하여 기쁘지 않았다    

거센 빗속에서 온 몸 다 젖어도

그게 눈물 탓은 아니었는데

내 마음 중심 잃고 하늘 따라 흔들린다    

그대 나에게 아주 조금 다정해져도

그렇다고 이제와, 참았던 내 이야기

전부를 말하는 건 싫었다    

그건, 지금 그대 모습보다 나에게서

더 나은 모습을 바랄 수 없는 이유이다    

아무리 빤짝이는 해가 나타나도

높은 산 뒤에 응흉한 모습 감추고

언제라도 가까이 다가와서

세찬 비 무섭게 쏟아 부어버릴 걸

저 먹구름에 속아 넘지 않겠다    

상처의 반복은 너무나 완벽해지고

그대의 다정함도 장마철 해같이

순간이란 걸 잘 아는 이유였다    

그대는 이제 해처럼 웃지 말길

굳은 내 마음 흔들릴 여유 없지만

그렇게 웃으면 상처가 덧나는 법    

소나기는 어쩐지 한결같지도 않은 그대

오는데만 넘쳐나도 정작 눈앞의 내겐

냉정하고 무관심한 그대 같아서

왔어도 오래 머물지도 않고 가버렸다    

밤 중 내린 비는 새벽길 적시고

멀쩡한 얼굴로 평소와 다름없이 가버린

날 울리는 짝사랑 그대 같아라    

덧붙임 : 간 맞추는데 꼭 필요란 소금도 지나치면 짠 맛보다는 쓴 맛이 더 크게 난다. 나는 지금처럼 돋보이지 않는 적당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대로의 그녀는    

이 비 끝에 젖은 치맛자락

슬픔 한 가득 얼굴 감추고 

마냥 마음 놓고 울어야지    

바람 같은 그대는 그녀 머리카락도

못 흔들고 가버리니 울 수밖에 없었지    

잠드는 순간까지도 생각했다고 말한다면 

그만큼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웃은 만큼 울어야 해도 괜찮다고 했을 거라네    

바람 같은 그대 지나가니 비마저 멈추고

눈물 얼룩진 모습 나타나니 부끄러워 

착한 그녀, 본심 감추려고 웃었지    

끝내 가버린 그대, 다시 안 올 그대

결국 돌아서야 하는 그녀라도

앞으로 참지 못할 그리움 못 견뎌내도

그대 그녀의 전부이던 때 있었으니

더 이상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끝없이 그대만 향하는 그녀의 본심

설령 변해버려도 달라질건 없을 테니까    

이미 멀어진 그대라는 것

그렇지만,

언제나 그녀는 그녀라는 것    

이 빗물 멈추면 바람이 와서

젖은 얼굴 말려주고 가겠지

다시 비 온다 해도 걱정하지 않겠지    

비는 위험하지 않고

바람도 무섭지 않다는 것을

한꺼번에 찾아오는 빛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으니까.                

당신, 참지 말아요    

알고 보면 당신은 힘이 세요

형체는 가는 곳마다 변할 줄 알면서도

그만의 성질은 늘 그대로 남고

티끌마저 받아들일 줄 알면서도

거대한 힘 절대로 과시하지 않아요    

가장 궁금해서 묻고 싶은 건

어떻게 끝없는 저 하늘 지지하나요

얼마든지 주저앉아도 그 누구도

당신 참 나약하다 말 못 할 텐데요    

하지만 가끔은 나도 그러하듯

살다 보면 책임과 의무가 싫증 날 때 있거든요

왜 당신도 그럴 때 있잖아요

살아있으니까, 아무래도 당신에게는

오늘 이 밤이 그런 날인가 보네요    

오늘 밤은 한낮보다 더 소란하군요

아마 하늘은 가장 무겁던 구름부터

내려놓고자 마음먹었는가 봐요

저녁 무렵 검게 부풀어 오른 걸 보았어요

갈라진 틈부터 새 나가기 시작했나요?

한밤중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양보 없는 자리다툼에 화가 났군요

길목을 막아서니 나래도 화가 났을 거죠

지금 이 소리, 이제 누구 고함이 더 큰지

꼭 아이들 철없는 장난 같아 보여요

하늘 가장 가까운 우리 지붕 위에서

왜 하필, 그러고들 있는 건가요

나 혼자만 그렇게 느끼나요    

솔직하게 말한다면 들어줄건 가요?

얼마나 더 오래 기다리면 사라질까요

몇 시간째 쉬지도 않고 지칠 때도 됐는데

이 분위기 얼마나 끔찍한지 

그 많던 착한별들 다 도망가고

믿음직한 해도 달도 모습 감추었어요    

아! 

그렇게 성내고 다투고 나면 후련하나요?    

이제 당신도 포기하려는 마음 드는가요

싸움 구경 아무리 재밌다 해도 

지금 오늘 밤, 구경나온 사람 없군요

아마 나처럼 눈만 감고 잠든 척 하겠죠

어쩌면 처음부터 다 듣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 떼려는 거겠죠    

나 지금은 불안해요

저 다툼 길어지면 불편해질까봐요    

차라리 성난 구름 모든 걸 쏟아내면

끝에는 편안해지기는 할까요

나중에는 홀가분히 높이 멀어질까요    

언제나 만져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손닿으니 가까운 것도 부담스럽네요

부탁할게요, 이제는 그만 다투세요

더는 보고 있는 게 불안해요

또 다른 걱정거리 안겨줄까봐요    

하지만, 다툼은 끝난단 걸 알아요

시작했다는 건, 끝내야겠다는 마음

그 마음부터 시작됨을 알고 있어요    

지금부터는 어디 두고 보겠어요

이 다툼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구름 떠받치는 당신, 지쳤다는 걸 알죠

싸움 구경도 다 그게 그것이라

나도 지루하네요 그만 보겠어요

다만, 시끄러우니까 얌전히 화해하길    

덧붙임 : 7월은 비만 내렸다. 날씨 따라 우울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차분히 내리는 비가 고맙기도 했다. 왜냐하면, 더위를 모르게 해주었느니까. 그런데 오늘 밤, 마치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그동안 참고 있던 말을 한꺼번에 하기라도 하듯, 천둥과 번개로 잠 못들 게 한다. 나도 다 들어주고 싶다. 그동안 말하고 싶어서, 그 울분을 차분함에 감추느라 얼마나 맘고생 했는지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네 맘껏 다 쏟아내길, 다만 그러고 나서는 괜찮아야 된다는 걸, 꼭 그러기를 바란다.                

당신 생각할 때    

당신은 지금 단잠에 빠져 있나요

지난밤을, 혹시 나처럼 뒤척인 건 아닌가요

내 생각나서 잠 못 들고 괴로웠던가요

나는 그래요 푹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한 아침

그런 아침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행여 가끔 내게 생각없이 던진 다정한 말은

나의 밤을 평소보다 길고 지루하게 하고

당신이 자주 그렇듯, 내게 냉정할 때는

속상한 고민에 더욱 더 긴 밤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고통은 불가분한 인연이에요

당신과 나처럼 그럴지도 모릅니다

진심이라고 믿는다면 아픔은 당연하게 

어쩔 수 없다고 믿어도 당신이 안타깝습니다    

나에게 진심이라면 시험에 들면 안 돼요

잔인한 혼돈이며 정돈된 마음 무너집니다    

당신을 따라가는 마음은 해바라기 같아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치장하지 않아서

순수함 그대로고 슬픔도 기쁜 대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얌전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 없는 수다를 늘어놓을 이유도 없어요    

말하지 않아도, 눈빛을 보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 생각할 때 내 마음 이렇게 아련한데

어떤 이유도 내 침묵에 불평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은 초라하지요, 가진 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실한 마음은 숨길 수 없어요

분명해서 가만있어야 더 잘 느껴집니다    

가식도 없으니 속아 넘어갈 이유도 없어요

당신 생각할 때 나는 언제보다 진실합니다

그러니 그 진심 앞에서 되도록 입을 다뭅니다

진실의 수많은 거짓 얼굴에

성급하게 당신 나를 오해할까 봐요    

누굴 생각하고 있을 때 말이 없어진다면 

이제부턴 속을까 봐 의심하지 말아요    

덧붙임 : 9월이 가깝다. 가만있어도 믿음을 주는 건 시간만 한 게 없단 생각이 든다.                                                                                                                                                    

타인의 계절    

날씨가 좋으면 소나무 숲 걷노라니

솔잎 사이로 파고드는 가을빛

내 온몸을 간지럽게 찌른다

그러면 나는 솜털까지 긴장하고

여기가 네 손 잡고 걷던 그 길 같다    

지난날 너의 기억에 의하면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은

전부 똑같은 계절이었다

그건 네 곁에 내가 있었던 이유였다    

너 없는 솔밭길 혼자 걷고 있노라니

내게 아무것도 아닌 이 계절이

너에게 어떤지 몹시 궁금하다    

떠났어도 다시 돌아오고 마는 계절이

우리에게 지나치게 벅찬 계절은 아니길

가고 싶지 않은 지옥의 계절이 아니길

그저 또 다른 계절이길 바랄 뿐이다    

덧붙임 : 이 가을을 아름답게 보려면 마음속 그 사람이 슬프지 않아야 한다.                                                                            

구름 같은 너    

눈에 선명해도 만질 수 없는 너

미로는 아니지만 길을 잃게 하는 너    

형체 없지만 기묘한 그림자도 드리우고

방향 없어도 네가 가는 곳이 길이 되고

고의가 아니라 말해도 오해를 남기면서

준비된 연인이던 나를 애태웠다    

예고 없이 바람을 세 번이나 맞았다고

하고 싶은 말 많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변명일 뿐

넌 항상 겉모습만 주고 내 전부를 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오래전에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항상 너만 바라고 있으니까

바람의 바람처럼 네 마음대로였다    

내 마음 어떤지 살피지도 않고

고백하고 나면 늘 돌아섰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인지

등 돌릴 때 넌 전부를 잊어버려도

그 하나로 내 마음 아팠다고 한다면

미안하다고 할까 봐 나는 그러지도 못했다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듯

그건 아니라고 핑계만 대도

내 모두가 전부 진심이라 해도

늘 자유처럼 가벼운 너는

텅 빈 아련함을 아름다움이라면서 

자신하고 나를 내내 아프게 했었다    

내 앞에 자주 나타나더라도

이제는 눈길 한번 주고 싶지 않다    

덧붙임 : 가을이 왔다고 성급하게 말하는 건 여름이 태풍을 연거푸 세번이나 맞은 탓이고, 아직도 남은 바람을 겁내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날씨가 아무리 변하고 계절이 지나가도 나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다.    

달빛 창가에서    

한밤중 이유도 없이 잠에서 깨면

저는 맨 먼저 창문부터 열어놓았습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그리하였습니다    

때마침 차오른 달빛에

은은한 은빛 치마를 두른 여인 같던 내 방

내 창은 부끄러움이 뭔지 모르는지

제 몸을 뼈까지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창마저 저리도 마음 풀어 놓으면

초저녁 단잠에 드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달빛의 시선이란 그런걸요

가장 먼저 비바람 맞던 창가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

곤한 잠의 숨마저 새어나지 않도록

보듬어준 탓이었던 것이죠    

솔직히 창문은 아무리 밝은 빛에도

제 창살을 쉽게 드리우지 않았습니다    

이 밤, 어쩐지 고요하다 느낀 건

먼지까지 품은 저 달빛의 시선에서

지난 낮, 그대의 눈빛을 보았던 이유입니다    

다정한 미소도 차가운 표정도 없이

마치 숨마저 참고 있는 것 처럼

저를 바라보는 그대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분주한 곳이라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대의 시선이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두려운 마음 다 사라지겠지 하던 것을요    

이 밤 은빛 치마를 두른 달빛의 울타리

아마도 그대는 저와 같은 곳에 있지 못해도

하늘가 오른 달을 보고 있는 이유겠지요    

그대가 아끼는 저를 그리며

저 달빛에 얼굴 환해진 이유겠지요    

이 밤, 창문 그림자만 보았어도

지난 낮 저를 바라보시던 그대의 시선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덧붙임 : 달이 찼다. 밤이 환했고 나는 초저녁부터 잠들었다가 여러 번 잠을 깼지만 조금도 기분이 나빠지지 않던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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