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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9. 2017

8. 한 겨울 열병


  드디어 가을이 앞산의 나무들과의 신경전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듯 보였다. 해와 가장 가깝던 산꼭대기만을 양보하는가 싶더니 이내 산 아래 붙어 있는 밭 언저리까지 모두 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만하면 승리를 자신했던 것인지 아니면 차마 소나무까지는 넘어서기가 어려웠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산의 중간 중간에 마치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는 듯이 검은색에 가까운 초록빛을 내는 소나무 한두 그루만이 나무는 본래 푸른 것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앞산을 기준으로 보이는 마을의 모든 풍경들은 마치 내가 전에 와 본적이 없는 동네라도 와 있는 듯 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런 기분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모처럼 엄마가 몸단장을 하고 계신다. 여름과 가을 내내 볕에 탄 엄마의 얼굴도 단풍처럼 물들어 있었다. 엄마는 얼굴이 발그레 할 때 꼭 어린 아이같이 보인다. 나는 뒤 늦은 아침으로 된장국에 말은 밥을 거의 마시다 시피 하면서 엄마에게 물어본다.

  “엄마, 오늘 어디가?”

  “응, 오빠들 학교. 오늘 큰 오빠 진학 상담 때문에 학교에 가 봐야 돼. 오전에 금방 갔다가 올 거니까 수인이는 집에 와서 엄마 없어도 그런 줄 알고 있어. 알았지?”

  나는 고개만 끄덕인다. 

  “엄마, 그런데 진학 상담이 뭐야?”

  “응, 큰 오빠는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잖아. 다음 달에 고입시험을 보려면 원서를 써야 하는데 어느 학교에 진학을 할 건지 선생님하고 상의하는 거야.”

  큰 오빠는 오빠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아니 군을 전체 합해서도 가장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나중에 판검사는 따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몇 번쯤 들었던 적이 있었다. 보통 가정형편이 좋지 않거나 학교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남자들은 공고에 가고 여자들은 상고로 진학을 해서 졸업하게 되면 바로 돈을 벌수 있도록 취직을 하는 것이 우리 동네의 일반적인 가정의 분위기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집안 형편이 나았거나 우리 집처럼 가난한 집이라도 공부를 특별하게 잘한다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것을 학교에서도 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덕구와 작은 오빠의 사건 이후로 생활의 모든 것은 평소대로 되돌아온 듯 보였고 어제와도 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면서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특별하고 조금은 이상하다시피 한 사건들을 거의 함께 했던 봉수는 이제 나의 모든 생활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앉았고 나는 내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가는 봉수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머리칼을 날리며 목덜미를 스쳐가는 바람이 차가워서 나는 잠깐 멈추고 입고 있는 잠바의 깃을 세웠다. 

  학교 운동장에 재문이와 정현이가 시소를 타고 있었다. 몸무게가 가벼운 재문이가 뒤쪽에 앉고 제법 통통했던 정현이는 앞 칸에 앉아서 균형을 이루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발돋움을 해줘 위로 올라갔을 때는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 춘선이는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입고 있던 치마가 들썩거리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지친 11월의 해는 그제야 얼굴을 내밀고 친구들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내 구름이 그 앞을 가로막았고 희미한 빛줄기들이 창백하게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느 쪽에서 인지 방향을 알 수 없는 답답한 바람이 또 다시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봉수는 내가 아니었다고 해도 본래 그렇게 조용하고 활동이 적은 아이구나 싶었다. 선생님이 수업을 알리는 쇠 종을 쳐야 교실 밖에 있던 아이들은 달려 들어왔는데 봉수만큼은 언제나 제 자리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봉수의 자리 쪽으로 걸어가서 아는 체를 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어디 갈 거야?”

  봉수는 특별히 할 일은 없다며 오히려 내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냥 ‘아직은 잘’ 이라고 어설픈 대답을 하고 내 자리로 와서 앉아 버렸다. 

  엄마는 지금쯤 큰 오빠 선생님을 만나고 있을까? 큰 오빠는 당연히 공부를 잘 하니까 학교에서도 모든 선생님들이 인정하고 좋아하는 학생일 것이다. 반면 작은 오빠는 공부는 큰 오빠만큼은 아니었더라도 제법 잘 하는 편에 속해 있었고 사실 잘생기기로 치자면 아무도 작은 오빠를 따라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작은 오빠의 말속엔 항상 사람을 생각에 빠져 들게 하는 무언가 마법 같은 이끌림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모두들 작은 오빠를 좋아할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엄마는 좋은 기분으로 오셨을 것이다.

  오늘따라 선생님이 칠판에 쓰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멍하니 칠판과 선생님의 말하는 입술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초록색 칠판에 창틀 그림자가 실제 모양과는 다르게 비정상적으로 굵고 길어지는 것을 구경한다. 그러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또 다시 구름이 해를 가로 막은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저녁때가 된 것처럼 운동장에는 회색빛이 감돌고 있었다. 창문에 이슬방울 몇 개가 부딪친다. 유리 창문에 배를 깔고 누워 있는 듯 창문에 딱 붙어 있는 작은 물방울 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물방울들이 계속 모여들어 점점 크기가 커지면서 무거워진 탓인지 유리창의 면을 따라 또르르 미끄럼을 타고 흘러내렸고 창틀에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아까 맞았던 답답한 바람이 비를 몰고 오느라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구나 싶었다. 

  “선생님 밖에 비와요.”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창문 밖으로 돌렸다. 선생님도 잠시 창밖을 쳐다보는 가 싶더니 내게 수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투의 시선으로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다시 말씀을 계속 이어 가셨다. 1학년 수업이야 늘 오전에 몇 시간만 보내면 끝이 났기 때문에 선생님 말씀이 오늘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던 날이라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렇게 지루한 수업을 계속 들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나는 절대로 고학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팔을 뻗고 줄이 달린 쇠 종의 손잡이를 잡고 ‘땡 땡 땡’하고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을 세 번 치셨다. 교실은 또 다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다. 비는 곧 그쳤지만 운동장의 마른 흙은 밀가루에 물을 몇 방울 흘린 것처럼 동글동글하게 뭉쳐져 있었다. 비는 이제 더 이상 내릴 것 같지 않았다. 또 다시 해가 구름을 걷어내고 얼굴을 내밀고 있었지만 신발을 신으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몸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바람에 서늘함이 느껴졌다. 가을비가 내린 뒤 날씨가 추워진다는 것은 이제 겨울이 가까이 와 있다는 표시였다.  

  “수인아, 우리 점심 먹고 만날까?” 

  교실을 먼저 나서는 나를 봉수가 불러 세워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니? 음. 집에 가면 오늘은 엄마가 계실거야. 그러면 오늘은 네가 점심을 먹고 우리 집으로 올래?”

  봉수는 그러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고 교실에 있던 우리들 모두는 제 각자의 뜻이 있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침에 신었던 엄마의 신발이 뜰 위 마루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엄마가 집에 돌아와 계신 것이다. 나는 반가움에 신발도 제 멋대로 벗은 채로 방문을 열었다. 엄마가 손뜨게질을 하고 계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로 이제는 겨울이 코앞에 까지 가까이 와 있는 것을 실감했다. 그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주는 엄마가 반가워 큰 오빠 얘기부터 물어 본다. 

  “엄마, 큰 오빠 선생님 봤어? 어떤 사람이야?”

  “응, 선생님은 다 훌륭한 사람이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거든.”

  “엄마. 큰 오빠는 고등학교를 어디로 가는 거야?”

  “수인아, 큰 오빠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 돼, 그렇지 않고 다른 델 가면 그 머리가 아까워서 안 될 거야. 그리고 대학에도 가고 더 많이 배워야 돼. 우리 수인이는 대학생이 된 큰 오빠 보고 싶지 않니?”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진정으로 대학생이 되어서 검은색 책가방을 옆으로 들고 다니는 큰 오빠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큰 오빠는 동네 사람들 말대로 나중에 판검사가 될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상상만 하고 있어도 큰 오빠가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엄마, 나 배고파. 나 그거 해줘 깨밥. 그리고 점심 먹고 봉수가 집에 놀러 오기로 했어. 같이 놀아도 괜찮지?”

  엄마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주신다. 나는 엄마가 비벼내 주신 깨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아랫목 온기가 남아 있는 구들에 배를 깔로 엎드려서 엄마의 손뜨개질을 구경했다. 집게손가락에 털실을 감고 대나무로 깎은 긴 바늘 끝에 실 구멍을 만들어 꿰어 내면 신기하게도 머리 땋은 모양의 털옷감이 생겨났다. 엄마는 매년 겨울이 오기 전에 식구들 스웨터를 순서대로 한 벌씩 뜨기 시작하셨다. 올해는 나는 그 옷이 누구 것인지 물어 보지 않았다. 언제나 아버지의 털 스웨터를 가장 먼저 짰으므로 당연히 지금 저 뜨게 옷도 아버지 것임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구가 캉캉 짖는 소리에 나를 부르지 않았는데도 문 밖에 봉수가 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봉수를 방 안으로 들였고 엄마는 아직 뜨거운 온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점심때 삶았을 고구마를 둥근 쟁반에 담아 내 오셨다. 아마도 봉수가 놀러 온다는 말을 듣고 깨밥 비빌 때 솥에 올려놓았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봉수는 손에 책과도 비슷한 공책을 한 권 들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내 주신 받아쓰기 숙제를 나와 같이 할 생각으로 공책을 들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나는 봉수가 우리 엄마를 어려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끔씩 봉수네 집에 놀러 가면 언제나 그 아주머니는 우리들에게 자리를 내 주시면서 무언가 할 일이 있다고 밖으로 나가셨고 나는 그런 봉수의 엄마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오빠들 방에 건너가서 둘이 숙제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본 뒤에 엄마의 그래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봉수를 데리고 사랑채로 갔다. 이것은 정말로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사건과도 같은 일이었다. 사랑채에는 몰래 엿보고 그래서 나 혼자만이 알고 있었던 오빠들의 꿈과 비밀이 있던 곳이었고 그런 공간에 봉수를 데려감으로써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나만의 비밀 세계 속으로 봉수를 참여하도록 허락했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 그 공책 숙제하려고 가져왔니?”

  “아니, 이건 공책이 아니라 너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야.”

  그러면서 봉수는 그 공책을 내게 내밀었다. 약간 두꺼운 겉장을 열자 그 안에는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그런 공주님들이 그려져 있었고 드레스 모양과 구두, 가방 등 다양하고 화려한 그림들이 있었다.

  “이게 뭐야?”

  “응, 종이인형 책이야. 나에게는 이런 게 필요 없거든. 어머니가 보건소에 다녀오면서 어떤 분이 주셨다고 가져다 주셨는데 어머니는 내가 아들이라고 말씀을 안 하셨던 모양이셔.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랬다. 말처럼 봉수의 엄마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보건소에서 일을 시작하셨던 것이었다. 대학 때 배웠던 간호 교육이 쓸모가 있었을 것이고 항상 일손이 부족했던 보건소 측에서도 봉수 엄마의 손은 아무래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름이 끝날 무렵 어느 날 봉수는 엄마와 같이 읍내 장에 다녀오던 길이라고 했다. 마을 입구 정치 아저씨네 집 앞에 병원차 한 대가 서 있었는데 평소와 같지 않게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고 병원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보이는 차림의 남자와 여자들이 그 집을 들락거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급박한 상황을 짐작했던 봉수의 엄마는 망설임도 없이 그 집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일전에 내가 덕구를 풀어 주었던 날 보았던 그 할머니를 사다리 모양의 천에다 평평하게 눕혀 놓고 흰 옷을 입은 남자가 할머니의 심장을 심하게 누르고 있더라는 거였다. 봉수의 엄마는 상황의 심각함을 단번에 알아차리시고 할머니에게 응급처치를 해서 숨이 왔다 갔다 했던 할머니의 숨을 정상으로 찾아 놓았다고 했다. 

  그 후로 봉수 엄마는 정치 아저씨의 소개로 보건소에서 일을 하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봉수는 엄마가 집에 안 계시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처럼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길어졌고 행이짓거리의 다리 아래를 자주 찾아 갔다가 우연히 집에 돌아오던 어느 날인가 그 집 앞 대문이 반쯤 열린 틈 사이로 마당에 나와 있는 할머니를 보았고 그 할머니가 괜찮아 지셨는지 궁금한 마음에 들어가 보았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몇 번 학교 뒷문으로 난 그 개구멍을 통해 할머니를 찾아가서 말벗을 해 드렸다고 하면서 정치 아저씨네 와의 인연을 설명해 주었다. 정치 아저씨네 자식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어서 다른 도시에서 제 각자 살고 있으며 아주머니는 그 집 자식들을 따라가 있어서 그 집에는 할머니와 아저씨 단 둘만이 남아 있다는 비밀 아닌 비밀 같은 사실을 나에게 알려준 사람도 다름 아닌 봉수였다. 

  정치 아저씨도 홀로 계신 자신의 어머니가 걱정이 되셨을 테고 봉수네 엄마에게 가끔씩 어머니의 건강을 살펴달라며 공손하게 부탁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내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처럼 꼭 그렇게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봉수의 말을 듣고 세상에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자기의 엄마 앞에서는 얼마든지 예의가 바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고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정치 아저씨를 한 두 번 보았을 때는 여전히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있었지만 나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더 쓸쓸하게 느껴졌고 안됐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오빠들 방에서 봉수에게 오빠들의 책과 물건으로 오빠들을 차례차례 소개해 주었다. 그건 마치 내가 이제부터 봉수와 정말 친한 친구가 되어서 어울려 놀아도 되는 것인지 두 오빠들에게 허락을 받고 있는 상황과도 같게 느껴져서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왠지 모를 이런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봉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분위기를 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바로 작은 오빠의 일기장속에서 보았던 제인 에어의 존재였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 마치 봉수는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봉수라면 기꺼이 내가 그동안 풀지 못했던 이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나 있지.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는데 아는 대로 대답해 줄 수 있니?”

  “뭔데? 물론이야.”

  “그런데 듣기 전에 먼저 나에게 약속해 둘 것이 있어. 지금 내 말을 절대로 누구한테도 말 하지 않겠다고 말해줘.”

  봉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나는 봉수에게 정말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일전에 선생님이 시를 적어오라고 숙제 낸 적이 있었잖아. 나는 그 수업을 대단히 특별한 수업으로 생각했었어. 왜냐하면 책이라면 우리 작은 오빠처럼 많이 읽은 사람을 못 봤기 때문에 작은 오빠 책장에서 대단히 멋진 시를 찾아내서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었거든. 그런데 그 날 우연히 작은 오빠의 일기장을 봤는데, 아니 물론 내용을 읽은 것은 아니야. 맹세코 믿어줘. 그런데 일기장 속에서 어떤 여자 사진을 봤어. 그런데 그 여자를 작은 오빠가 대단히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 여자가 보통의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래서 혼자 고민하다가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 버리게 된 거야. 너도 혹시 제인 에어라는 여자에 대해 알고 있니?”

  봉수는 다소 어수선하게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내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제인 에어 사진? 혹시 뭐라고 써있지는 않았니?”

  “음......... 사진은 사진인 것 같은데 마치 어떤 책에서 오린 것처럼 낡은 흑백 사진처럼 보였고 사실은 그 뒤에 작은 오빠가가 - ”나는 당신을 로체스터 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 라고 써 놨었어.”

  봉수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혹시, 책 속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나는 그동안 왜 하지 못하였을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작은 오빠가 마음에 병이라도 난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도와주지 못하는 마음에 안타까워하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나도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께 여쭤볼게. 단, 이 문제가 너의 작은 오빠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할 테니 네 걱정대로 이 사실이 새어 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

  나는 봉수의 말투와 눈빛에서 진심어린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작은 오빠의 비밀을 털어 놓은 것에서의 죄책감으로부터 약간의 면죄부를 받은 듯 조금은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너도 그럴 게 아니라 작은 오빠한테 물어보면 어떨까? 이렇게 반대로 이야기하면 되잖아. 내가 제인 에어라는 사람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고 있다면서 오빠는 왠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몰라 물어보는 거라고 하면서 말이야.”

  나는 맘속으로는 정말로 작은 오빠가 봉수와의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순순히 우리의 덫에 걸려들까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어쩌면 그 방법도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안 방문 옆에 걸린 달력이 12월이라고 큰 글씨로 써져 있다. 아슬아슬 겁을 내던 날씨도 이제는 점점 힘이 세진 북풍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 사람처럼 따뜻한 기운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산의 떡갈나무들은 껍질이 두꺼운 가지만을 남긴 채 땅으로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려 버렸고 앞산도 점점 희미한 갈색으로 변해 있어서 모든 나무들이 이제는 숨을 죽인 채 눈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지난 며칠사이 동산 동쪽에서 해가 고개를 드미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름철 항상 집 마당위에 솟아 있던 해는 이제 하늘 높이 반짝 떠올라 있는 것을 겁이라도 내는 듯 점점 그 때를 늦춰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산의 아침 풍경을 그동안 참 많이도 보아 왔었지만 지난 며칠간의 풍경은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처럼 눈앞에 다가왔고 그래서 인지 한편으로는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겨울이 해를 이렇게 게으름뱅이로 바꿔 놓음으로써 나와의 사이도 멀어지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이렇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을 닫히게 하는 심술을 가져오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가올 시간들이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엄마가 벌려 놓은 자리에 앉아서 멥쌀 반죽으로 동그랗게 새알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지 팥죽을 끓여 주시려는가 보다 했다. 엄마는 그런 내게 새알을 나처럼 예쁘게 잘 만든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나이만큼 새알을 먹어야 내 년에 한 살을 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동글동글하게 빚어진 새알을 들고 부엌으로 나가는 엄마를 따라 나갔다. 새알이 어떻게 솥에 들어가는지 그 모습을 매년 보아 왔었지만 이 풍경은 일 년에 단 한번밖에는 볼 수 없었으므로 내 눈에 그 모습을 선명하게 다시 기억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마솥 안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는 팥물에 흰쌀이 솥의 가운데서부터 원을 그리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듯 무질서하게 흩어졌다. 그 속에 엄마는 정성스럽게 새알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갑자기 솥 안이 고요해 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흰쌀들이 솥에 빠진 새알들을 위로 밀어 올려준 것처럼 하얗게 둥둥 떠올라 있었다. 엄마는 아궁이의 타고 있던 장작을 작은 옆 칸의 아궁이로 옮기자 가마솥 안은 안정을 되찾은 듯 보였고 아주 작은 기포만이 끈끈한 찰기로 겨우 겨우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엄마가 커다란 양은솥에 팥죽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한 그릇씩 담아 집안의 곳곳에 작은 상에 받쳐 가져다 놓았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는 이미 몇 해 전에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여덟 살을 꽉 채울 만큼 채웠던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 알고 있었다. 팥죽은 식은 후에 먹으면 더 좋은 맛이 나기 때문에 차려진 밥상 앞에서 조금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새알 여덟 개를 마저 먹지 못했다. 작은 오빠가 대신 먹어줘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다 먹지 못한 새알을 먹어 주었고 이제 나는 걱정도 없이 내년에 아홉 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평소와 같이 아버지와 엄마는 나를 곁에 두고 나란히 누워 계셨고 나는 두 분의 대화 속에 몰래 귀 한쪽을 내밀고 있었다. 

  “수호가 아침에 코피를 쏟았어요. 너무 부담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선생님도 학교에서 수호한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다면서 아이가 이번 고입시험에서 마치 수석이라도 해야 될 것처럼 말하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녀석이 고맙게 공부를 잘 하니까 기특하잖아. 꼭 일등이 아니라고 해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로 잘한 거야. 사람은 배워두면 어디에서든 쓸모가 있게 돼 있어. 그리고 최소한 나같이 기름때 묻혀 가면서 살게 할 수는 없잖아. 자식들이라도 이렇게 안 살게 해야지. 시험이 이제 얼마나 남았지?”

  “열흘정도요. 당신도 저 안 만났으면 이렇게 힘든 일 안하고 배울 만큼 배워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거예요.”

  “무슨 그런 말을 해, 사람 서운하게. 나는 당신 만난 거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그리고 당신이 우리 애들을 이렇게 바르게 키워주고 있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뿐인걸.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하고는 엄마의 등을 도닥거려주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엄마가 학교 상담을 다녀오신 날 밤 큰 오빠가 방에서 나와 동산 쪽 화단에 앉아서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아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오줌이 마려워 마루에 놓인 요강에 오줌을 누고 있었는데 사랑채 문이 열리는 가 싶더니 큰 오빠가 나왔고 화단 큰 돌 위에 앉아서 한 숨을 쉬는 듯 땅으로 고개를 푹 숙이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는 것을 몇 분 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큰 오빠에게 있던 작은 오해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었다. 나를 먼저 알아 본 오빠는 왜 잠이 깼는지 물었고 나는 오줌을 마려워서 그런 것인데 큰 오빠는 왜 이 시간까지 잠을 못 들고 나와 있는 것인지 궁금하였다고 말하자 큰 오빠는 처음으로 나를 동등하게 대하면서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만큼 두 배를 더 살았던 큰 오빠는 집안의 어려움을 잘 알았고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바로 돈을 벌어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할지 아니면 모두의 바람대로 아니 본인의 꿈대로 인문계 학교로 진학을 해서 그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공부를 계속해야만 할 것인지 고민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났던 경선이 언니에 대해서는 사실 큰 오빠가 한 살이 많던 그 언니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사실로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어야 된다며 자신의 모든 꿈을 포기하고서 산업체 학교로 들어갔었던 경우가 마을에서도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에는 이렇게 서글프고도 안타까운 사정이 있던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나는 경선이 언니를 자세히는 몰랐지만 예쁘고 착하고 똑똑한 언니라고 생각했었고 동네 사람들은 부모 복을 못타고 나서 그것이 저렇게 희생을 하게 되었다고 매우 아쉬워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어느 정도의 분위기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시간이란 재촉하고 서두른다고 해서 절대로 나의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오히려 12월의 끝은 나를 어둠과 고독 속에 가두어 두고 모든 것을 정지시켜 버린 듯 너무 고요하기만 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성탄절이 조용하게 무심히도 지나가 버렸고 학교에서는 이제부터 길고 긴 겨울방학에 들어가라고 통보하였느니 앞으로는 어쨌든 나를 분주하게 오고 가게 만들었던 등교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시간이 들쑥날쑥하게 되었던 것이다. 겨울은 결국 사람마저도 이렇게 게으름뱅이로 바꿔 놓고야 말았다. 문 밖의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이미 마당에는 두 눈만을 남겨두고 털옷으로 온몸을 칭칭 감다시피 한 봉수가 하얀 눈사람처럼 우뚝 서 있었다. 

  “수인아, 나 드디어 알아냈어!”

  “무엇을 알아냈다는 거야?”

  “응, 그 사람, 제인 에어가 누군지.”

  나는 그동안 큰 오빠의 일로 정신이 팔려 있어서 얼떨결에 봉수한테 털어 놓았던 작은 오빠의 비밀을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작은 상을 들고 나오시면서 봉수한테 얼른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셨고 뜰에 올라선 봉수는 그제야 몸에 쌓여 있던 눈을 털어냈다. 엄마가 상에 내 오신 것은 삶은 고구마였다. 겨울이 되면 안방의 윗목에 커다란 고구마 가마니를 가져다 놓았었고 엄마는 거의 매일 매일 고무마를 삶아 내시거나 아궁이의 알불로 군고구마를 만들어 내셨다. 

  봉수가 방 안으로 들어와 모자가 달린 외투를 벗었을 때 그 아이의 품 안에서는 두꺼운 책이 한 권이 나왔는데 나는 선명하게 두껍게 보이는 표지에 필기체로 써 있었던 [제인 에어]를 한 번에 알아보았고 책을 내미는 봉수의 손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한참동안 눈길에서 망설임으로 서성였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엄마는 ‘아이고, 손이 얼음장이네.’하시면서 봉수를 따뜻한 아랫목으로 끌어다 앉혔다. 방안의 온기 탓인지 봉수의 양쪽 볼은 금세 붉게 상기되었고 언제나 하얗기만 하던 봉수의 얼굴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서 차라리 귀여운 아기의 모습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봉수가 가져 온 책을 엄마가 보기 전에 이불안에 감추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 다 날 지경이었다. 

  엄마는 내 오신 고구마를 우리 곁에 두고서 뜨개질거리가 담겨 있던 소쿠리를 가까이 끌어가다 계속 하고 계셨다. 나는 엄마에게 봉수를 데리고 사랑채에 건너가서 방학 탐구생활 숙제를 하겠다고 말하고는 오빠들 방으로 건너갔다. 아주 짧은 순간동안 이었지만 온 세상을 뒤 덮어 버린 하얀 눈 탓인지 눈이 부셔서 멀리까지는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해만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자연이란 이렇게 놀랍도록 조용하지만 무서운 힘을 가진 존재이구나 싶어 마당에 쌓여 있던 눈을 함부로 밟을 수 없겠다는 마음으로 이미 봉수가 내 놓은 발자국만을 따라 조심조심 걸어갔다. 

  큰 오빠는 이제 시험이 코앞이었고 작은 오빠도 곧 2학년에 올라가게 되므로 방학을 했어도 한 달 동안은 학교에서 하는 보충수업을 받으러 다녔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오빠들 방을 내 맘대로 쓸 수가 있었다. 아침에 엄마가 지펴놓은 군불 탓인지 사랑채 지붕 너머로 뽀얀 연기가 굴뚝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눈과 같이 섞이며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방문을 열고 봉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내가 어머니한테 제인 에어가 누구인지 물어 보았거든. 너의 말대로 사진 뒤에 써진 것을 말하자 엄마가 보건소에서 이 책을 가져다 주셨어. 아무래도 제인 에어는 이 책속의 주인공을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심각하게 봉수의 설명을 듣고 봉수가 품안에 가져온 책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본 부분 아래는 뜻을 알 수 없는 표시로 한글과 숫자가 뒤섞여 써진 하얀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 책, 어머니가 빌려다 주신거니?”

  봉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빌려서 읽어 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인데 만일에 그 시간 안에 다 읽지 못했으면 한 번 더 연장을 할 수가 있다고 하셨어. 그런데 어머니가 이 책을 왜 찾느냐고 하셔서 그냥 수인이가 전부터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고 그렇게 말했어. 괜찮지?”

  잠깐 봉수의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두 손에 책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책 표지에 그려진 여자는 작은 오빠의 일기장 속에서 보았던 여자와 무척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목 뒤에 한 묶음 머리를 하고 있던 꼭 같은 그 여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제인 에어의 실체를 밝혀냈으니 작은 오빠에게 가졌던 걱정스러운 의문을 풀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한 가지 일이 해결된 뒤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뒤 따라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내가 저 두꺼운 책을 읽어내서 이렇게 겉으로만 말고 속속들이 전부 다 알아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불쑥 붉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첫 장을 들춰보기가 겁이 났다. 그래서 책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봉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미 내 눈 속에 서려 있던 비장함을 느꼈던 봉수는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수인아! 겨울방학 동안 우리 함께 저 책을 읽어 보자!”

  봉수와 마음이 통한 것이다. 이따금씩 봉수가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면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불편했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와 발음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었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을 품에 안고 나는 봉수의 눈을 보고 마치 결심이라도 섰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책의 분량과 시간의 문제였다. 

  “봉수야, 너 나와 정말로 [제인 에어]를 같이 읽어 줄 수 있어?”

  나는 봉수에게 그럴 듯한 제안을 했다. 책의 맨 끝 쪽을 보았다. 481쪽까지 있었다. 

  “이 책 어머니께서 언제 빌려다 주신 거니?”

  “어제 저녁에 보건소에서 오시는 길에 빌려오셨다고 하셨어.”

  그렇다면 2주일에서 반납하는 날과 어제의 하루를 빼게 되면 12일이 남게 된다. 481쪽을 12로 나누게 되면.......... 나는 책상에 놓여 있던 작은 오빠의 연습장에 481 나누기 12를 했다. 우리가 하루에 40쪽씩 읽으면 12일 동안 이 책의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봉수를 얼굴을 다시 보면서 마침내 결심이 섰다는 듯 말했다.

  “너는 하루에 20쪽씩만 이 책을 읽으면 돼. 나도 20쪽씩만을 읽으면 되고. 단 어떻게 해서든 하루 만에 그 스무 쪽을 다 읽어내야만 돼. 그리고 그날 각자가 읽은 내용을 서로에게 이야기 해 준 뒤에 책을 돌려주고 그 다음 쪽부터 읽어 나가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봉수는 반달 눈 웃음을 지으며 지나치게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노란빛이 도는 머리카락이 눈썹 아래를 찌르는 것 같이 헝클어져 보였기 기 때문이었다. 

  “나부터 시작할게. 작은 오빠가 점심때가 되면 학교에서 돌아올 거야. 어떡해든 오빠한테 이 사실을 들키면 안 돼. 무슨 말인 줄 알겠지?”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첫 장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봉수는 멀뚱멀뚱 내가 책 읽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고 나는 눈을 부릅떠가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는 제인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갑자기 동정심이 생겼고 특히 사촌 동생의 잘못으로 외숙모가 다락방에 가뒀을 때 혼절을 했던 제인 에어가 마치 나 자신인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정말로 아팠다. 나는 내가 읽어내야 할 분량을 완전히 읽어내고 봉수에게 그 내용을 말해 주었다. 봉수는 정말로 심각하게 마치 나의 비밀을 들어주던 사람처럼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소중한 물건을 다루 듯 외투 품안에 책을 감싸고 눈 속을 뚫고 나아갔다. 나는 쏟아지는 눈 속에서 점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봉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다행히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날은 저녁때가 되기 전에 봉수네 집으로 달려가 책을 전달해 주었고 봉수는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전날에 자기가 읽었던 내용을 정말로 자세하고 진지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나는 봉수의 말을 들으며 내가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들에 덧그림을 그려 넣었고 어느 덧 그런 날들로 일주일이 지나가 버렸다. 책의 내용은 이미 중간을 뛰어 넘어서고 있던 것이었다. 

  그 해 우리 도의 고입 시험에서 큰 오빠는 대 사고를 치고 말았다. 정말로 동네잔치라도 해야 할 분위기였다. 큰 오빠는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수석으로 시험을 통과한 것이 되었고 또 다른 만점자들이 몇 있었지만 이렇게 큰 오빠처럼 시골에서 그런 학생이 나오기는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뒤 오빠는 군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입학금은 당연히 면제를 받았지만 고등학교 생활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은 조건으로 수업료와 약간의 생활비를 대 준다는 정말로 믿기 힘든 제안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것은 제안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무척 건방져 보이며 겸손함이 없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태도였고 나는 왜 어른들이 이래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는 말을 하는 것인지 조금은 이해 할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정말로 큰 오빠가 판검사라도 된 것처럼 입에 부러움이 담긴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내게는 시험이 끝났어도 공부를 멈추지 않던 큰 오빠가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제인 에어! 마치 당신의 한쪽 팔은 내 왼쪽 늑골 아래에 있는 근육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마치 당신이 이 대륙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나가게 된다면 내 몸에서 당신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아서 나는 피를 흘리며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요..........”

  나는 봉수 앞에 서서 제인 에어 책을 두 손으로 가슴에 품은 채로 이 부분을 마치 내가 로체스터가 된 것처럼 읊었다. 책을 전달해 가면서 읽는 것이 마치 바통을 터치해 가며 계주를 뛰는 것과 같단 생각이 들었고 책의 진도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는 점점 내 자신이 제인 에어가 되어서 봉수에게 로체스타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내 마음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제인 에어가 되어서 로체스터를 마음에 품고 그 해의 마지막 12월에 종신형을 고하면서도 1월의 어느 날이 성큼 다가와 있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봉수에게 책을 전달해 주러 갔던 날 추위에 몸이 떨리는 것도 모르고 내가 봉수 앞에서 부끄러움을 타는 가 착각을 한 적도 있었다. 

  숨이 가뿐 열흘이 흘러갔다. 봉수와 나는 누가 먼저 약속을 깨지도 않은 채 마치 맹세라도 한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잘 지켜내고 있었다. 로체스터와의 제인 어에의 결혼식 장면이 불청객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던 날 밤 저택의 숨겨진 곳에 살던 정신 이상자인 로체스터의 아내가 숀필드 저택에 불을 질러 활활 타오르던 장면을 마치 내 눈앞에서 직접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책을 읽으면서 울고 있는 나는 이제 제인 에어를 향한 작은 오빠의 상사병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한 낮 열병에 불과한 것임을 점점 알아가고 있었고 그것은 처음부터 일기장 속에 깊숙이 감추고 숨길만한 비밀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달력이 한 장 더 넘어가서 해가 바뀌어 버린 단 열흘 동안에 내가 부쩍 어른처럼 커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봉수는 밤사이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었던 사람처럼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너 어디 아파?”

  봉수는 그냥 미소만 지어 보였다. 

  “사실은 나도 기분이 좀 이상해. 그냥 마음이 답답하고 이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책의 끝을 네가 읽어 주었으면 좋겠어. 도저히 끝을 읽어낼 자신이 없어 봉수야.”

  나는 봉수 앞에서 나도 모르게 울먹였다. 그냥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가 영영 이대로 이별을 해 버릴 것만 같은 생각에 그 끝을 알아 낼 용기가 없다고 말했다. 책은 이제 50쪽이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책은 오늘이 지나면 그대로 도서관으로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수인아,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여기까지 인 것 같아. 사실은 나도 결말이 어떻게 될지 조금은 두려워. 그럼 우리 이제 작은 오빠가 왜 제인 에어를 사랑한다고 했는지 알았으니까 여기에서 그만 둘까?”

  우리는 눈 쌓인 낮은 돌담에 그냥 엉덩이를 깔고서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한 겨울 오전의 날씨란 어른이라도 쉽게 얼어붙도록 만들어 버릴 정도로 냉정하게 차가웠다. 나도 봉수도 콧물을 훌쩍거리기 시작했지만 우리 둘 중의 누구하나 먼저 이제 일어나자고 쉽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나와 봉수가 앉아 있던 자리는 동그란 모양으로 눈이 살포시 눌려 있었다. 볼이 얼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봉수한테 책을 건네주려고 갔다가 책을 품에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해는 떠서 온 세상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고 쌓인 눈이 반사시키는 빛으로 눈이 부셨다. 발이 얼음처럼 굳은 것인지 걸음이 잘 걸어지지 않았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신발 앞 코에 힘을 가득 싣고 살금살금 얼어붙은 길을 걸어갔다. 

  덕구는 눈이 좋은 건지 신기한 것인지 신발 한번 신어본 적이 없는데도 눈에 발자국을 수도 없이 찍어 놓았다. 나는 덕구가 발 시려 운 것을 모르는가 보다 했다. 방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까린 이불속으로 들어가서 손을 엉덩이 아래로 깔고 천정을 보고 누웠다. 손에 전기라도 통하는 듯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몸이 녹아내리면서 낮잠이 들었던 것인지 그대로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수인아, 어디 아프니? 점심 먹어야지.”

  엄마는 이미 밥상을 차려다 놓고 잠에 푹 빠져 있던 나를 걱정스럽게 깨우셨다. 오빠들은 엄마가 끓여주신 김치 수제비를 먹고 있었다. 작은 오빠는 제법 큰 수제비 덩어리를 입속에 넣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내게 핀잔을 주었다. 

  “너 요새 봉수를 매일 만나는 것 같더라. 너희 서로 좋아하지? 아주 쪼그만 것들이 꼬마 사건에나 신경 쓸 일이지.”

  라고 빈정거리는 주둥이를 쏘아 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제인 에어를 읽고 상사병에 걸렸던 작은 오빠에게 동정이 생겨서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 나는 조금 있다가 먹을게. 배 안고파.”

이렇게 말하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더운 내 숨 탓이었는지 이불속은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날 점심은 그렇게 건너뛰었다. 나는 오후에도 계속 이불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자다 깨다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또 다른 반나절을 보내고야 말았다. 겨울은 아침이 늦게 보내주는 만큼 반대로 밤은 너무도 빨리 찾아오게 했다. 나는 길어진 어둠 탓으로 불이 꺼진 커다란 새장 속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밤이 싫은 건 아니었다. 지금은 그냥 이 사실을 감당해내기 벅찬 것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내 곁에서 잘 굴러가고 있었기에 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울음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하도 오래 참고 있어서 마음에 멍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멍은 시간이 지나면 특별히 약을 쓰지 않더라도 본래대로 돌아오는 법이었으니까 마음의 멍도 그냥 저절로 낫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마치 꿈속에서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같이 아버지의 날숨에 엄마는 들숨으로 화답해 주고 있었다. 

  나는 덥고 있던 이불을 들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밤의 찬 공기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군불한번 지핀 적이 없던 윗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동그란 백촉다마가 엷은 주황색 빛을 아스라이 뱉어 내는 방안은 황량했고 묵은 먼지 냄새가 코를 푹 찔렀다. 들고 간 이불을 머리부터 망토처럼 두른 뒤 남은 이불을 바닥에 방석처럼 깔고 앉았다. 그리고 큰 숨을 내쉬고는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런 자세로 몇 시간을 읽은 것인가. 제인 에어는 불구가 되어 있는 로체스터를 찾아가서 다시 사랑을 맹세하는 결말이었던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몸의 손과 발은 마음속으로 그 온기를 다 빼앗겨 뻣뻣하고 차갑게 굳어져 버린 느낌이 들었고 나는 그대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뜨거운 눈물방울이 차가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것은 기쁨의 눈물이었음을 감동의 눈물이었음을 실감했다. 정말로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뚝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책 위로 떨어지는 것을 어쩔 도리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었으므로.

  거의 구르다시피 방을 빠져 나온 나는 안방의 따뜻한 이불속에서도 한참이나 몸을 곱사등같이 세우고 웅크리고 있은 후에야 비로소 조금씩 편해짐을 느꼈고 언제 잠이 드는 줄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내 머리카락을 누가 다 뽑아내는 통증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엄마는 머리맡에 작은 세숫대야에 더운물을 떠다 놓고 계속 적신 수건을 내 이마 위에다 놓아 주고 계셨다.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의 끝까지 내 몸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 바늘로 계속 쑤시는 것처럼 따가운 통증과 함께 천정이 빙글빙글 돌면서 마치 내 몸이 방바닥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계속 내 옆을 왔다 갔다 했었지만 나는 그 사람들의 희미한 형체만이 보였고 목소리 또한 한데 뒤섞여버려서 마치 벌이 웅웅거리는 것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으므로 누가 내 곁에 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열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끝내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행복한 결말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이제야 마음이 놓인 듯 쌓여있던 긴장이 풀려나간 자리를 심각한 열병이 찾아 들어왔던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온 가족을 긴장시키면서 나흘간을 보냈다. 엄마는 열병이란 한 번 앓아 본 사람은 다음번에 혹시 다시 열병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이미 내 몸속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서 이번처럼 아프지 않고도 가볍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날 봉수에게 책을 전해 주지 못하였다. 도서의 대출 기간이 이미 마감을 넘겼지만 내가 나타나지 않음을 걱정하여 우리 집에 왔을 때는 나는 이미 열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었을 때였고 오히려 며칠간을 이불속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누워만 있느라 한 겨울의 지겨운 날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어느 새 1월도 남은 며칠만을 붙들어 놓고 있었다. 이제 겨울도 나처럼 그 고비를 넘긴 것이었다. 나는 누워서 지내는 동안 차라리 겨울이란 내게는 없어도 될 것 같은 계절쯤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아프고 난 뒤 그 전 보다 특별히 무언가를 많이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숨만 쉬며 앉아 있어도 시간을 흘러가는 법이었다. 나는 이번 겨울은 속절없이 서글프기만 하던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 밖을 나서면 모든 것들이 벙어리처럼 조용했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서 사랑과 이별이라는 강렬하고도 날카로운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어쩌면 내 나이를 뛰어넘기에도 충분했던 풍부한 감성을 알게 되면서 빠져들어 버리는 것이 어떤 것임을 경험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흰색이 더렵혀지기 가장 쉬운 것처럼 겨울이 유난히 하얗던 이유도 왠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만 같았고 강한 겉모습에 비해서 한없이 약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계절이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단 한번 만으로 제인 에어에게 완벽히 빠져들었던 것처럼.  

  이래서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고 하는 가 보다. 마치 영원히 비밀로 부쳐 둘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사건은 나의 열병으로 인해 모두에게 완전히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은 이 사건도, 작은 오빠의 자동차 유리 사건과 같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책을 감명 깊게 읽었던 작은 오빠의 사소한 감상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밀이란 어쩌면 나 혼자만의 호기심과 관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나 스스로 꾸며낸 한낮 해프닝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이며 어쩌면 진정한 비밀이란 오래도록 감춰 두었을 때만이 그 신비함의 빛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점점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혼자만의 비밀을 가질 수 있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작은 오빠는 나에게 사소한 일도 심각하게 만드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있다고 하면서 매우 어려운 말들을 들려주었다. 

  사람은 자기가 기대고 싶은 대상에게 위로 받기 위해 나무도, 꽃들도, 구름도 심지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초까지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살아 있는 것 중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일이 있은 뒤에 엄마는 ‘이제부터는’, ‘이 다음번에는’, 그리고 또 ‘앞으로는’ 이런 단어 뒤에나 따라 올 법한 조건들이나 혹은 내게 의무를 부여하는 식의 연결어를 통해서 나의 행동을 조금씩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말을 듣기 시작했다는 것은 마치 엄마와의 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이 들리기도 했지만 그 대신에 그 조건어들은 다리와도 같은 존재로써 다가오기도 했었다. 커 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점점 엄마 품에서부터 멀어지게 되지만 나와 엄마를 연결시켜 주고 엄마를 향해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놓이게 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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