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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9. 2017

10. 돌고 도는 계절


  우리는 마치 침묵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구의 인내심이 오래가는 지 겨루는 사람들 같았다. 장맛비를 마시고 제법 살이 통통하게 오른 풀과 나뭇잎들이 맑은 쪽빛을 자랑하면서 한 데 뒤엉켜 있었다. 햇볕이 고스란히 내려 낮은 냇물은 보석처럼 반짝거리면서 쉼 없이 흘렸으며 누구네 집에서 나온 것인 줄 모르는 오리 떼들이 물가의 얕은 쪽에서 물속에 고개를 파묻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구정물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쩌다 고개를 하늘로 향해 길게 늘어뜨리고 목구멍으로 불퉁한 무엇인가를 삼키기도 하면서. 

  “오빠, 무슨 생각해?”

  여전히 말이 없다. 나는 그런 작은 오빠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매번 이런 식의 침묵 게임에서 작은 오빠는 승자였고 나는 패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기분이 좋았다. 사고 이후 재활치료를 열심히 한 덕분에 작은 오빠에게는 휠체어뿐만 아니라 목발조차도 사치품처럼 되어 버렸고 우리 가족은 그 사실에 대해 온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신들을 들먹이면서 감사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직 온전한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작은 오빠의 걸음걸이는 정말로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때는 눈물이 나오기도 했지만 나는 절대로 그렁그렁한 눈물에 파묻힌 눈을 보여주지는 않았었다. 

  “작은 오빠? 요새는 무슨 책 읽어?”

  책 이야기야 말로 작은 오빠의 잠긴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가장 잘 맞는 열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우리들의 대화는 책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책의 이야기로 끝을 맺기가 일쑤였고 나는 점점 내 수준에 맞지도 않는 어려운 책들까지 읽기에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래야 작은 오빠의 입을 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수단이 목적을 배반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처음의 내 목적과는 달리 점점 나도 책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졌고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그 속의 삶은 내가 절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나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지 그 한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우리가 읽을 책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읍내 도서관에서 빌려다 주셨거나 아니면 봉수네 엄마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우리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정말로 훌륭하다고 칭찬하기도 했고 반대로 나쁜 인물을 보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까지 악하게 될 수 있을까 욕을 해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사람들은 책 속에 장애의 몸을 갖고 나오거나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 버린 사람들이었다. 작은 오빠 앞에서는 일부러 그런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인물들을 마주쳤던 날들은 밤잠을 다 설치게 될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던 것이었다. 그건 마치 작은 오빠 앞에 펼쳐지게 될 인생의 한 면을 미리 보고 온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아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때 가장 내 마음에 인상적이던 책은 [삼대]라는 짤막한 소설이었는데 나는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마치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진지한 동정심을 느꼈고 책 속에 구구절절 표현되지 않고 내용이 짧게 끝이 나는 것도 어쩌면 그것은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뇌의 과정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극복해 내야만 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줌으로써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잔인하면서도 끝없는 서글픈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려는 의도같이 보이기도 했었다. 작은 오빠는 물론 그 책을 이미 읽었을 테지만 나는 내가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작은 오빠? 아직도 작가가 되는 게 꿈이야?”

  이것은 어쩌면 작은 오빠에게 너무나 직설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어떻게 보면 잔인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테지만 어쨌거난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작은 오빠를 결코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고 또한 그렇게 하려고 각자의 말과 행동을 항상 관찰하기도 했었다. 나는 동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인물도 제일 훤하게 생긴 애가 다리병신이 되었다고. 작은 오빠는 예상을 깨고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이제는 그 꿈 말고는 다른 것에는 절실함을 못 갖게 된 것 같다. 이수인! 너는 이 오빠가 보기에 정말로 나이에 맞지 않게 마음이 너무 커 버린 것 같다. 이제는 책을 조금씩만 읽든지 아니면 네 수준에 맞는 백설 공주, 신데렐라 이런 동화책을 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작은 오빠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소공녀]부터 출발 했어야 했음에도 계단의 서너 칸쯤을 그냥 건너뛰어 버린 개구리처럼 바로 [제인 에어]를 밟지 않았던가. 

  그리고 심장을 과녁으로 여긴 듯 화살처럼 날아 들어와 정확하게 박히게 하는 말로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해 주기도 했다. 작은 오빠는 본인의 불구가 된 몸을 보통사람의 기준대로 맞춰 살아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했는데 삶이 힘들다고 느끼는 감정이란 나 자신을 다른 누구와 비교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이미 고정되어 있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고달프고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이대로 커 나가서 어른이 된다면 반드시 어떤 곳에서든 저절로 빛을 내는 보석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은 내 심장에 심어주는 용기의 씨앗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내게는 정말로 훌륭하고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이 불끈 솟아나기도 했었으므로.

  “너는 아직도 가수가 꿈이니?”

  나는 은근히 장난 끼가 발동하였던 것이었는지 아홉 살이 되면서 어느 순간 가수의 꿈을 마음속 저편으로 보내버렸음에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약속했잖아. 유명한 가수가 돼서 돈을 많이 벌면 아버지는 자동차 사드리고 엄마는 금반지 사주고 큰 오빠는......... 판검사를 하려면 양복이 많이 필요하니까 멋진 옷을 여러 벌 사 준다고.”

  “그럼 너는 나한테 뭐 사 줄래?”

  나는 일부러 조금 뜸을 들이며 작은 오빠를 애 태웠다.

  “작은 오빠한테는 가장 특별한 선물을 해 줄 거야. 지금 말해줄까? 아니면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래?”

  “무슨 그런 대답이 다 있냐. 어떤 특별한 선물을 해 주려고.......”

  나는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만 대답하기도 했다. 

  ‘작은 오빠에게는 제인 에어 보다도 더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운 여자 친구를 데려다 주고 싶어.’

  우리의 이런 진지한 대화는 주로 태양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시간대에 오고 갔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나는 작은 오빠를 한 걸음 앞서서 걷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그림자로 보이는 키는 항상 동등하게 키를 맞춰 주고 있었고 매순간 작은 오빠의 절뚝거리는 걸음 탓에 시소를 타는 듯 한 양쪽 어깨는 내 두 눈을 붙잡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습마저도 부드럽고 우아한 춤을 추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고 어쩌면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그 사람의 그림자로 표출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가끔씩 다리를 다친 작은 오빠가 로체스터처럼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진 못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아직 벌어지지도 않는 상황을 미리부터 걱정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우체부 아저씨네 큰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로 한 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는데 나중에 장가라도 잘 보낼 생각에 있는 살림 없는 살림을 다 털아 가면서 분수에 넘치는 미국 유학 공부까지 시켜주었고 결국에 처자 한 명을 데리고 온 다는 것이 사지가 멀쩡한 여자였지만 그렇게 평생을 마음 졸이면서 애지중지 하며 키운 자식을 장가보내면서도 새 식구로 들어온 그 며느리의 눈치를 얼마나 보았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에 나의 이런 생각을 엄마가 들었다면 분명히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에 별 생각까지 다한다고 핀잔을 주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작은 오빠가 다친 다리 때문에 진실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런 모든 지나친 생각들은 물론 책을 너무 많이 읽게 되면서 나의 생각이 아주 멀리까지 미칠 수 있었던 것인지는 몰랐었지만. 그래선지 가끔씩 책 속은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전부를 믿지는 말라던 작은 오빠의 충고가 이해가 되기도 했다. 

  덕구는 정말로 바쁘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었다. 덕구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젖을 먹이고 제 새끼들의 온 몸을 핥아 주느라 내게 하던 애정표현에는 조금씩 소홀해져 보였지만 엄마는 덕구를 사람으로 치자면 담뱃 집 할머니가 아기를 낳은 것과 꼭 같은 거라고 정말로 귀한 일이라고 말씀하셨고 정말로 덕구가 새끼를 낳던 날 엄마는 미역국까지 끓여 밥을 말아 주시기도 하셨기 때문이었다. 암컷과 수컷을 나란히 맞춰 낳은 덕구는 참말로 기특하게도 저를 쏙 빼닮은 누렁이 강아지들을 거두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고 배가 땅에 닿을 정도로 뒤뚱뒤뚱 아기돼지처럼 배를 불린 새끼 강아지들한테는 비릿한 분유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계속 맡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덕구한테는 마지막 새끼들이 될지도 모를 강아지들을 같이 키우기로 이미 합의를 했고 덕분에 나의 할 일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여름 볕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단련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장맛비로 말끔히 청소가 되었던 집 앞의 냇물도 바닥에 조금씩 이끼를 깔기 시작하면서 계절은 어느 덧 여름 날 한 가운데까지 성큼 달려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호박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는 이번 여름은 냇가에 노란 호박꽃이 한 송이도 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작년과는 다름 여름이었다. 

  봉수는 다시 내가 처음 보았던 봉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던 날들이 계속되었고 여름 방학이 시작하기 일전의 날 나를 찾아와서는 마치 대단히 어려운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처럼 땅과 먼 산들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기를 며칠째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너 요즘 왜 그래?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이런 식으로 몇 번을 양쪽 바지주머니에 주먹을 찌르고 조금은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던 봉수에게 조금은 골이 나 있던 상태였기에 다정하게 대해 줄 마음이 생기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오셨었어.”

  나는 봉수의 그 한 마디로 앞으로 펼쳐지게 될 봉수와의 모든 관계는 이 순간에 종지부를 찍어버리고 이제부터의 모든 일 들이 상상만으로 그치게 될 뿐 별달리 실현될 것이 없겠다는 대단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곧 봉수가 어쩌면 엄마와 함께 우리 동네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이란 걸 굳이 끝까지 그 이야기를 다 듣지 않았더라도 나는 봉수의 말투와 지난 며칠간의 행동에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응. 방학 전에.”

  또 다시 봉수의 대답은 본래의 그 모습으로 돌아간 그동안의 봉수의 모습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고 나는 그 순간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되었다. 

  “내일 할아버지가 다시 오시기로 하셨는데........ 어머니가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실 것 같다고 그러셨어. 할머니가 그동안 어머니 소식을 모르셔서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고.........”

  나는 모든 상황을 단 몇 초 만에 알 수 있었지만 봉수가 내일 떠나야 한다는 그 사실은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 다행이네.”

  봉수는 나와 함께 동산에라도 오르자고 말했지만 나는 그럴만한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등을 돌리고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얼마동안 집 앞에 봉수가 서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처음부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작은 오빠가 그런 우리를 보고서 정말로 전처럼 꼬마 녀석들이 퍽 진실한 우정을 쌓은 모양이라고 빈정거릴 줄 알았지만 그냥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오빠의 시선에 위로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금방이라도 쏟아져 버릴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에게도 이렇게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 생기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사실은 왜 이렇게 갑자기 말을 해 주어서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봉수 앞에서 또 다른 말을 시작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끝까지 숨기고 싶던 말들까지도 한꺼번에 말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의 말이란 건 언제나 진흙에 내리는 비와 같은 것이라 결국은 진흙탕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해가 뜨는 것을 보자마자 동산으로 올라갔다. 동네의 어느 곳이든 내 마음이 닿는 곳이라면 언제라도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들 뜬 기분까지 되었지만 해는 빠르게 뜨거워졌고 정말 소도 잡을 만한 날씨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코끝에서 땀이 나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것이 콧물인 줄 알면서 계속 닦았지만 혀끝에 스치는 맛은 어차피 둘 다 같은 맛이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이도 하늘의 짙은 구름이 해를 가려 주었고 그 구름의 그림자가 내가 있던 대나무 숲을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대나무 숲으로 계속 더 들어가자 썩은 낙엽을 뚫고 특이한 모양의 독버섯들이 고개를 드밀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발로 밟고 나뭇가지로 쓸어내기도 하다가 문득 그 색깔과 모양이 정말로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집으로 따 갖고 갈 수는 없었다. 예뻤지만 그것은 엄연히 독버섯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찬란하게 밝은 태양 볕의 반대쪽에는 언제나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또 다른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법이었으니까.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떡갈나무의 중간  쯤 되는 곳에 사슴벌레와 처음 보는 신기한 벌레들을 괴롭히면서 어서 오늘 하루가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나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한 법 이었다. 봉수가 우리 집 앞에서 작은 오빠에게 작은 봉투를 건네는 것을 보았고 봉수네 집 앞에 서 있던 작은 트럭도 앞에 서 있던 자가용을 금세 뒤따라 나가고 있었다. 자동차는 행이짓거리 다리 위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너무나 태연하게 지나쳐 버렸고 나는 자동차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떡갈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바보, 멍청이, 천치, 바보, 멍청이, 천치.........”

  나는 끝내 봉수에게 ‘잘 가.’라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 앞에서 눈물을 참을 자신이 없었고 그리고 그 것이 내가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과 또한, 내가 지금 어떻게 할 수 없는 봉수를 이해하고 있으며 느끼는 감정에 대해 무어라 표현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무작정 ‘잘 가’라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밝은 햇살 아래로 나와 커다란 바위에 앉았다. 나무 끝에 걸린 구름에 몸을 잠깐씩 숨겼다가 곧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면서 나를 괴롭히던 해가 꼭 자기와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보챔으로 보였지만 그냥 모든 것이 귀찮은 생각이 들었고 제풀에 기가 죽은 해는 곧 숨바꼭질 상대를 구름으로 정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구름 뒤를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집으로 들어 온 내게 작은 오빠는 봉수가 전해 주고 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아무도 안 보는데 숨겨 놓아야 될 거야. 거의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의 약점을 골려먹기를 좋아하거든. 그게 가족이라도 예외는 아니니까.”

  작은 오빠는 내 모습이 그저 귀엽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 편지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반으로 접은 봉투를 주머니 속에 푹 집어넣었다.  

  편지의 내용은 그냥 흔한 이야기였다. 하기야 어떤 특별한 내용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우리가 여전히 열 살도 안 되었던 한낮 꼬마들에 불과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하루 이틀이 지나가면서 점점 마음도 가벼워졌다. 왜냐하면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쉬는 날이 되면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셨고 나도 한 번씩 그 만남에 동참하기는 했었지만 그다지 유쾌했던 분위기는 아니었으므로 특별히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싶었던 날이나 차를 타고 조금 멀리 떠나보고 싶었던 날에만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큰 오빠는 모두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모든 일을 척척 잘 해내어 주고 있었으며 작은 오빠도 조금씩 조금씩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토끼는 한 번 새끼를 낳으면 놀랄 만큼 많은 숫자를 낳았었기 때문에 제 식구들을 금방내로 불려갔고 아버지는 또 다른 큰 토끼장을 만들어 아예 뒤뜰로 옮겨 놓으셨다. 덕구도 제 아들딸과 아쉬움 없이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듯 보였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마치 시간이 영원과도 같았다.’라는 말이 지금 이 순간과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우리들이 그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그 시간이 멈춰져 있기를 희망하기에 영원과도 같다고 느껴지는 것이라 믿게 되었다. 이렇듯 계절은 돌고 돌아서 또 다시 나에게 여름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지금 아홉 살 여름 안에 갇혀서 지내고 있었으므로. 

  받는 사람이 정확하게 “강 봉 수” 라고 써져 있는지를 몇 번을 확인한 꽃 편지지 봉투를 아주 조심스럽게 빨간 우체통 속에 집어넣고서는 그 앞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그렇게 한 참을 서서 있었다. 제법 훌쩍 높아진 하늘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섞여 있던 가을 향기가 폐부까지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책속에 써져 있던 것처럼 정말로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며 힘들기만 한 것일까. 엄마와 아버지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계셨지만 내가 이제까지 만났던 어떤 어른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사랑하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셨다. 내 인생에서의 스침과도 같은 잠깐의 만남뿐이었지만 고모의 삶이 정말로 불행하게 보였던 것도 어쩌면 행복과 불행이란 다 같은 곳에서, 각자 내면의 만족과 불만에서 오는 감정인 것임을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책 속에서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게 되면서 인생이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고 계절의 끝이란 또 다른 계절의 필연적인 시작임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면서 그렇게도 갑작스럽게 떠나간 봉수를 정말로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항상 하루가 끝나는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노을이 불타올랐고 언제나 친숙했던 앞산은 제 몸을 매일 비슷한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화답해 주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토라진 마음을 감추지 않았던 나처럼 노을에 등을 돌리고 잔득 예민하게 굴었는데 그건 마치 앞산이 한 마리의 거대한 고슴도치가 되어서 어디론가 느릿느릿 걸어가느라 그 피부에 나 있는 가시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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