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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편. 간직할만 한 슬픔

할머니, 이제는 편안히 쉬세요.

by 김현이

“얘야, 너 갖고 싶은 것 골라라. 알았지?”


여섯 살 먹은 바가지 머리의 그 꼬마는 자기와 왠지 닮은 듯한 아기 인형을 품에 안고서 금발머리의 마론 인형들이 진열되어 있는 쪽으로 망설이며 다가간다. 고개를 들고 높은 곳부터 낮은 곳까지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는 인형들의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선뜻 어느 것 하나 고르지 못하고 주저하며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그 꼬마를 이 인형 가게로 데리고 온 아저씨는 같은 또래의 다른 남자애를 위한 로봇 장난감을 이미 한쪽 손에 들고 있었고 꼬마 스스로는 장난감을 고르지 못할 것을 짐작하시고는 아까부터 그 꼬마를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유심히 관찰하던 주인아주머니한테 이 가게에서 가장 크고 장식이 많은 커다란 마론 인형 박스를 내려달라고 말씀하신다. 그제야 그 주인아주머니는 그 꼬마가 대단히 귀엽기라도 하다는 듯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오랫동안 팔려나가지 못해 박스위에 쌓여 있던 뽀얀 먼지를 소맷자락으로 성급하게 닦아낸 뒤 가격을 말한다. 자기 몸집보다도 더 큰 그 인형박스를 끌어안고 아저씨 뒤를 졸졸졸 따라오는 꼬마는 왠지 오늘 처음 본 이 아저씨한테 무척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크고 멋진 인형을 선물 받았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기쁨의 마음 뒤에는 내가 이 장난감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자꾸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주인아주머니의 못생긴 입모양에서 그 장난감의 가격이 3만5천원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3만 5천원, 지금 천오백 원 하는 콘 아이스크림이 그 때는 백 원이면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할머니의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의 언니, 그러니까 내게는 이모할머니의 남편, 이모할아버지의 초상집에 그때 여섯 살이던 나는 할머니를 따라갔었다. 그 집은 나지막한 언덕길에 들어선 집들 중 하나였는데 파란색 지붕과 파란대문, 시멘트로 깔려 있던 마당 안쪽에 깊숙이 앉아 있던 그 집은 아담했지만 깨끗하고 다정한 느낌이 났었다. 이모할머니는 당신의 눈에 내가 띌 때마다 먹으면 혓바닥이 새빨개지는 둥글납작한 모양의 깨물기 쉬운 사탕과 약과를 손에 쥐어 주셨다. 나에게 마론 인형 세트를 사주신 그 아저씨는 이모할머니의 아들이었고 나는 그 인형을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갖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여섯 살이던 나는 이모할아버지의 꽃상여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할머니와 이모할머니, 그리고 잘 모르는 어른들이 입속으로 말을 삼키면서 곡을 하시던 그 슬픈 울음소리와 장면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보았던 할머니와 연결되어 있던 분의 첫 장례식이었다.


그 뒤로, 20년이 흐른 뒤에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남편, 나에게는 친할아버지의 초상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생각과 수준의 차이에서 오는 불화로 많이 다투셨다. 거의 일방적으로 할머니한테 할아버지가 퉁을 먹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할머니가 매우 영특하셨던 분이셨던 반면에 할아버지는 조금은 부족한 분이셨기에 그런 차이에서 오는 답답함이 그런 잦은 다툼들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모신 방에서 안방마님 다리를 하시고 앉아서는 연거푸 담배를 두 대나 피우셨다. 할아버지와 다투실 때 말버릇처럼 하던 그 말씀 - ‘내가 저 양반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는가 보라지.’ - 은 잊으신 것인지 애꿎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껐다하기를 반복하시며 소리가 안나는 울음으로 울고 계셨던 것이다. 정말로 커다란 눈물방울이 할머니 무릎위로 떨어져 나중에는 바지의 무르팍이 비를 맞은 듯 젖어 있었으므로. 그것이 내가 본 할머니와 가까운 사람의 두 번째 장례식이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아이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달력을 함께 보며 5월 5일 토요일, 어린이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날 외할머니 댁에 갈 것이라고 말했었다. 새벽 다섯 시쯤 조용히 일어나서 밤에 돌려놓고 잔 세탁기안의 빨래를 꺼내 널어놓고 밀린 집안 정리와 청소를 했다. 아이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으며 청소하고 거의 기다시피하면서 방과 거실을 닦았다. 벌써 일곱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집안일을 다 마치고 아이들과 내 짐 꾸러미를 챙기고 나서 아침 여덟시가 되기 전 집을 나섰다. 큰 아이 둘을 뒷자리에 앉으라 하고 막내 단우 몸을 카시트에 고정시키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우가 가방 속에 있던 전화를 받았다. 아이들은 전화통화를 할 때 습관적으로 스피커를 누르는데 카시트 벨트를 고정시키고 있는 내게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선우한테서 전화를 건네받자마자 한참동안 울먹인 듯 잠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이야, 할머니가 돌아가셨나봐.”

“응?, 언제? 왜 갑자기......”

“응, 오늘 새벽에 화장실 가셨다가 쓰러지셨나봐, 지금 모시러 가.”

“.........”

“정우야, 왕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단다.”


안 그래도 최근 건강이 부쩍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해 계신 할머니도 찾아 뵙고, 근처 유원지에 아이들도 데리고 가 볼 마음을 먹고 있었던 터였다. 3일 동안 연속 연휴여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주차장만큼이나 차들로 들어차 있었다. 평소와 같이 뚫린 길이라면 두 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다섯 시간을 길바닥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정오를 막 넘은 시간이었고 장례식장에는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되어 있다며 제단에는 어떤 장식도 없이 할머니 영정 사진만이 놓여 있었다. 큰 아이 작은아이가 어젯밤 내가 먼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할머니를 가져다 드린다고 붉은색, 분홍색 색종이로 접은 카네이션을 가장 먼저 할머니 앞에 놓아 드렸다. ‘할머니,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나는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었다. 큰 아이가 엄마의 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인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마치 타인의 위로에 감정이 더 격해져 복받쳐 울 듯 아이의 그 행동으로 나는 더 슬프게 울었다. 오후 두 시쯤, 제단위에 국화꽃으로 장식된 꽃장식이 놓였고 조문객을 위한 국과 밥이 커다란 보온 통에 들어가 앉았으며 그 때부터 사람들이 한 둘씩 찾아오시기 시작했다. 나는 맏상제의 막내 딸, 할머니 큰 아들의 막내딸이니 검은색 상복을 입었다.


나는 여덟 식구 중에 막내였다. 내가 기억할 수 있을만한 어린 시절에 나는 옆으로 누워 있는 할머니 앞을 차지하고는 그 팔을 베고 누었었다. 그렇게 잠이 들고 나면 아침 녘 누군가 내 머리맡에 앉아서 이마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간지러움으로 잠이 깼었다. 언제나 할머니는 내가 참을성이 많은 아이라고 했었다.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영리하다며 이제까지 내게 영리하다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해 주셨던 사람도 바로 우리 할머니였다. 또 어떤 날에는 어둠이 내리면 찬물로 몸을 닦으시고 흰 소복을 갈아입으시고서는 수박크기 만한 항아리에 물을 반쯤 담고 집에서 찐 백설기와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 밥 한 그릇을 떠다 놓으시곤 자정이 넘을 시간에 소지종이를 태워 올리시면서 자식들의 건강과 안위를 기도하시기도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기도가 다 끝날 때까지 자르지 않은 김에 공들인 밥을 싸주시길 기다리면서 잠들지 못했었고 포슬포슬하게 익은 하얀 백설기를 공들인 손으로 떼어 주시는 것을 배가 부를 때까지 받아먹고는 했었다. 생각해 보니, 배가 고팠다기보다는 그런 음식은 공을 들인 귀중한 음식이기도 했지만 그때 만해도 먹을 것이 귀하 던 우리 집에서 일 년에 몇 번 오지 않던 매우 특별한 날이었으므로 먼저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삼촌, 이렇게 아들을 둘 두셨다. 고모들이 둘 계셨지만 옛날 분들이 자식을 적게는 다섯부터 많게는 열까지도 두셨던 분들과는 조금 적게 낳으신 편이었다. 이른 봄철, 내 손을 잡고 함께 쑥을 뜯으러 가시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죽이라도 쑬까하고 들에 쑥이라도 뜯으러 나오시면 파랗게 돋아난 것이 쑥인지 못 먹는 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현기증이 났었다고 하셨다. 현기증이 날 때까지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고 가난은 아이도 많이 못 낳을 정도로 할머니를 그렇게 만드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들이던 아버지는 삼촌과의 나이차가 열세 살이나 났다. 열다섯, 열여섯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셨던 우리 아버지에게 지금 내 막내인 단우보다도 어렸던 동생까지도 아버지의 책임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밖에는 배우지 못하셨다. 할머니가 중학교를 가라고 보냈더니 알고 보니 다른 집 품팔이를 해서 그 품삯을 가져다 할머니한테 드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삼촌, 그러니까 한 분만 계시는 작은 아버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수준 높은 대학의 영어영문학과 교수님이다. 그래서 할머니를 찾아온 조문객의 절반 이상은 대학교 교수들이었다. 곱게 잘 나온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할머니는 정말로 영리하신 분이시구나. 어떻게 그렇게도 가난한 집에서 자손들을 이렇게 모두 훌륭하게 잘 되도록 키우셨을까.’ 나는 영정 앞에서 속으로 울다 그치기를 반복하면서 두 눈이 빨갛게 변하는 것도 상관없이 자꾸만 너무 늦게 온 것을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이튿날, 정각 오후 두시, 가족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이제는 할머니를 정말로 편히 모실 준비인 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의 우리들은 어느 누구는 큰 소리로 또 다른 누구는 숨을 죽였을 뿐 모두 함께 울었다. 할머니의 마지막이 안타깝고 애절한 슬픔으로 울기도 했겠지만 그것보다 우리들은 할머니와의 각자의 기억으로 울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지난 난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라서 울었고 이제는 앞으로 영영 두 번 다시는 그런 날들이 오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속상함의 울분으로 더 크게 울었다. 수의 버선을 신고 바지를 입고 한 겹 두 겹 몸을 감싸시고 누워 계시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나는 속으로 할머니한테 말했다.


‘우리 할머니 참 곱다. 어쩌면 이렇게도 고울 수가 있어요. 이제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잘 지내세요.’


삼일 째 되는 날, 이제는 정말로 할머니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모시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전날에도 온 종일 비가 왔었다. 그날도 계속 굵은 비가 내렸다. 가뜩이나 파헤쳐진 땅은 물을 흠뻑 머금고 있어서 걷는 걸음마다 발목을 붙들 정도로 발이 푹푹 빠졌고 그래서 할머니를 뒤따르는 우리들은 앞 사람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서 걸었다. 그날의 빗물은 멋쩍은 남자들의 눈물을 감출 수 있게 해 주었고 여자들에게는 계속 울고 있어도 누구의 시선과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며 마치 우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아서 그런 것처럼 신경 쓰지 않도록 고맙게 해 주었다. 모든 절차의 마지막 예배를 들이자마자 능선에 물안개가 피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고 곧 거짓말과도 같이 구름이 물러나면서 해가 나왔다.


‘그래, 묘소에 덮은 잔디가 하나도 죽지 않고 참 잘도 자라겠구나. 곧 연녹색으로 번져나간 잔디를 볼 수 있겠지. 할머니는 어느 새 가벼워진 저 구름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겠지?’


햇살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나는 손바닥으로 작은 그늘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45년을 할머니와 함께 하시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며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당신 몸이 아파서 할머니한테 마지막을 소홀히 하신 것에 심한 죄책감을 갖고 계신 것 같았다. 사실 고운 정보다야 미운정이 더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곧 미안함으로 내 자신에 대한 부덕함으로 다가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마치 이 상황과 매우 비슷한 이치리라. 내가 준 선물과 선행보다 타인에게서 받았던 친절과 고마움을 더 오래까지 기억하게 되는 것처럼. 내가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았던 것은 두 달 전 엄마의 생신 때였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도 몰랐으면서 그때 나는 집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급한 마음 때문에 할머니의 손을 바로 놓아버렸었다. 먼 곳도 아닌 단 일주일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어도 할머니가 살아계실 텐데 생각하니 계속 눈물이 나온다. 정말로 잘해 드렸던 일들보다는 서운하게 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못해 드렸던 기억만 떠올라 너무나 마음이 아파왔다. 이것이 당신이 안계신 우리 할머니, 난리를 두 번씩이나 겪으시며 격동의 한 세기를 살다가신 나의 할머니의 장례식, 내게는 세 번째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영원한 이 이별, 이것이야말로 두고두고 간직할만한 슬픔이 아닐까.


‘할머니, 벌써 보고 싶네요. 할머니가 그렇게도 예뻐하셨던 내 새끼들 데리고 자주 보러 갈게요. 그때까지 잘 지내고 계세요.’


2018. 05.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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