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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편: 굿바이-2, 증오하는 여자

그 날 밤, 아이의 한 마디에 펑펑 울고 말았다. "엄마! 사랑해요."

by 김현이

현재 증오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여자는 남자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 쉽다. 그 여자가 보통의 여자들과 달리 이제껏 바른 길로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한 번 실망한 것과 좌절감을 맛본 것에 대한 적대감은 그 어떤 합리적인 결과를 고려해 봐도 쉽게 걷잡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증오는 외부에서 진정하라는 뜻으로 그 어떤 충고와 위로와 걱정의 말에도 방해받지 않고 최후의 상황까지 계속 커지면서 점점 번져나가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번 비슷한 상처를 입은 여자는 그 상처 난 자리를 찾아내고 또 찾아내어서 그 상처를 찌르는데 매우 적합하게 훈련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그런 여자는 더욱이 그 대상에게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경우에 그 정도는 훨씬 강하고 심해진다. 그래서 여자는 그 고통을 위하여 비수처럼 날카로운 송곳날에 찔리고 칼날에 베여 그 상처가 점점 커지더라도 더 이상은 그 외부 교류와 절교를 선언하고 그 여자만의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내려고 한다. 반면, 남자들은 어느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며 괴로워하며 증오하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마저도 쳐다보는 것조차 피하게 되면서 점점 마음속은 너그럽고 관대해지면서 자신이 대단한 덕망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행동한다. 마치, 자기 자신은 모든 불운의 결말에 대한 책임과 원인에서부터 이미 초월하여 애초부터 발을 떼고 멀리 떨어져 나가서 그다지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착한 마음인 체 한다.


누구든 잘하고 싶을 때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특히 날씨가 사람을 혹독하게 괴롭히는 날들은 마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이라도 당하는 듯 단 몇 분 사이에도 그 기분의 높낮이 간극이 커지고 한 번 터져버린 화의 감정은 이성적으로는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인 스스로도 자제하지 못하여 뒤 따른 엄청난 후회로 자괴감마저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기쁨이 낮아지게 되고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려버리기까지 한다.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하고 싶던 말을 다 해 놓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려움을 침묵으로 견뎌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쁜 감정을 통해 어떤 내용의 말이라도 결코 타인에게 좋은 인상으로 전달되지 못하며 오히려 무책임하게도 불행의 감정마저 전달할 수 있는 위험마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운 마음을 쉽게 고백해서는 안 된다.


아주 사소한 일을 못 견뎌내는 마음 상태를 두고 남 탓을 하면서 지내는 사람은 정말로 형편없는 사람이다. 또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에게까지 그 화의 감정이 전달되게 한다는 것은 아예 어른으로서 기본적인 도덕적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매우 심하게 혼내고 화를 냈던 날, 미안함을 사과하고 싶었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용기를 내지 못하여 아이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말했던 날 밤, 나는 밤새도록 펑펑 울었다. 아이가 했던 이 한 마디 ‘엄마! 사랑해요.’를 듣고서.


거의 한 달 전의 일로 집에서 키우 던 열대어 레드가 죽던 날 나는 ‘굿바이 –1’을 썼다. 비단 레드만이 아닌 내 안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안녕’을 고하며 죽은 레드를 빗댄 것이라고 지금 고백한다. 그 뒤로 약 일주일 뒤, 큰 아이가 수족관에서 직접 고른 분홍색 암컷 베타를 데려와 레드가 살던 집에 보금자리를 꾸며 주었다. 처음 며칠간은 밥도 잘 먹고 헤엄도 잘 치고 나머지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명랑하고 활발하게 지내는 가 싶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정말로 적응을 잘 해냈구나!’ 싶어서 매우 안심하게 되었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분홍이는 몸이 허옇게 변한 채로 물 위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이른 새벽 내 눈에 가장 먼저 발견된 분홍이에게도 레드에게 해 준 것처럼 구급함에서 거즈를 꺼내 염을 하듯 하고 편안한 곳으로 보내주었다. 함께 한 시간은 고작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큰 아이가 집적 선택했고 또 우리 집에서 잘 적응했던 분홍이의 죽음은 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마음이 석연치 않을 리가 없었다. 레드만큼은 아니었지만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그런 섭섭함이었다.


돌아보면, 이렇게 나는 본래부터 감수성도 풍부하고 누군가에게 악랄하게 구는 그런 위인은 못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증오하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마흔이 되고 보니 나는 그런 여자로 변해 있었다. 나 자신이 그렇게 느끼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란 처음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고 점점 나 자신이 하찮은 미물만도 못한 게 아닌 가 점점 나에 대한 자신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상실감과도 같았다. 그러고 나니 한없이 슬퍼졌다.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고 거의 한 달 동안을 하염없는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슬픔마저도 제대로 표출할 수 없는 여건에 놓여 있었던 건 내가 아이를 책임지고 어떻게든 그 아이들을 건강하게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가 지친 나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마음보다 더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한 밤중에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 시간 동안 나 자신의 운명을 탓하기도 어떤 날은 ‘이것이 내 숙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하고 한없이 처연해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던 시간들로 벌써 한 달이 넘어갔다. 보이는 길이 있는데, 그래서 곧장 그 길로 달려가고 싶은데도 모든 여건들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심사로 나를 더 가혹하게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악순환이 계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맞바람 속에 서서 미세한 모래 한 줌을 손에 쥐고 바람을 대항해 내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큰 아이가 했던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에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깊이와 무게를 잴 수 없는 힘에 의해 나 자신이 내 던진 모래 먼지를 고스란히 눈과 코, 입으로 들이마신 사람처럼 요즘 내게 한없는 부끄러운 생활들만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다시 나는 그 어떤 대단한 포부와 원대한 꿈을 꾸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단 한 가지라도 내 아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생활을 실천하면서 지내야겠다고.


하지만, 증오하는 여자는 애초부터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바라거나 욕심이 많아서 내 것으로 전부다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그런 여자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대부분 날들에 성실하고 인내심이 많던 여자였다는 것이 현재 극복하기 어려운 가장 큰 문제라면 문제이다. 이 사실이 증오하는 여자를 더욱더 암울하게 한다. 나는 그게 가장 무섭다.


2018. 7. 26. 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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